2013년 9월 28일 토요일

풀밭에서-조지훈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직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가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