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이준관의 ´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 외


<고구마에 관한 시 모음> 이준관의 ´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 외

+ 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삶이라는 것도
저렇게 고구마처럼 땅에 묻혀 있는 것이다.

땅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손으로
그는 고구마를 캔다.
자신의 삶을 캔다.
토막날까 조심하면서.

어느새 서쪽 하늘에는
그가 캔 황톳빛 빨간 고구마,
저녁놀 뜨고,
아이가 하나 그 고구마 베어먹으며
길에 서 있고,

그는
흙이 다 된 맨발을
서쪽 하늘에 저벅저벅 남기고 간다.
(이준관·시인, 1949-)
+ 고구마 밭에서

흙무덤 속에서만
너는 살아 있는
살아 있는 한
너는
흙무덤 속이 고향이다.

고향 사람들은
줄기줄기
새끼줄에 꿰듯
정을 뿌리로 하고 산다.

고구마는
고향 사람들을 닮아
정으로 매달려
뿌리를 흙에 묻고 산다.
(진의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고구마 푸대

폭설로 길 끊어지기 전 고구마 푸대를 짊어진 채
어느 아비의 마음이 급한 산길을 달려 아들이 공부하는
암자로 올라가 아궁이를 지펴놓고 내려가나
벌써 산길 끊어졌다.
(조정권·시인, 1949-)
+ 고구마

온양 봉곡사에 가서 고구마를 먹었다

오랫동안 눈 맞추던 부처님 무릎과
능엄경 몇 구절에서도 고구마 냄새가 났다
장소가 장소인데도 고구마를 건너가지 못했다

봉곡사 솔밭을 빠져나온 나는
길가에 꼬부리고 앉아 있는 개망초 무리를 보고
큰 위안을 얻었다

아무래도 내 본향은 이 자리 근처인 모양이다
(안수환·시인, 1942-)
+ 한국의 고구마는 억울하다

줄줄이 엮어 불리기
비슷한 무리들끼리 뭉치기
실마리 하나만 끄집어내면
우르르 끌려나오는 덩어리들
그래서 툭하면 비유되어
한국의 고구마는 억울하다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나
너무 자주 거론되다보니
흠집만 커져 단맛은
줄어가는 듯도 하지만
넘치는 혈연 학연 지연으로
수확량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임영준·시인, 1956-)
+ 고구마 복음

성탄 이브, 싸락눈 치는 읍내 사거리에
고구마 익는 내가 캐럴을 타고 진동한다.
드럼통 안 이글거리는 열기에도
연신 된 입김을 쏟는 청년이 굽는 것이다.
날 선 냉기에 더욱 푸르러진 푸성귀,
비린내마저 냉동되어 버리는 냉동 갈치,
바람 스쳐 더욱 오그라든 끝물 사과며
홍시를 파는 좌판들의 코도 발씬거릴 무렵,
문득 청년은 양푼에 고구마를 가득 꺼내
아이쿠 뜨거워, 손을 털며
아이쿠 뜨거워, 손을 털며
어쩌려고 하나씩 죄다 나누어준다.
사거리를 종종 치며 건너는 촌로들은
멈칫멈칫 돌아보며 얼굴이 환해지는데,
구두를 닦는 노인, 가죽배를 미는 총각까지
그것 하나씩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그것 함부로 껍질을 까지도 못하고
무슨 복음이라도 되는 양 가슴에 감싸니,
맨날 도회지의 작은댁 가기에 바쁜
하느님도 이 광경을 어떻게 돌아보았는지
때마침 싸락눈의 마음을 돌려선
날 저물며 함박눈으로 펑펑 바꾸더라니
(고재종·시인, 1959-)
+ 할머니와 고구마

정갈하게 동백기름 바르시던
할머니 모습 자꾸자꾸 그립다
정읍땅 양지바른 모퉁이에서
완행열차 끄트머리 얻어 타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우리 집 구석방으로
함박웃음 머금고 할머니 따라온
고구마 얼굴 보니
정숙이를 정석이라고 부르며
사내 동생 보게 했다고
초등학교 때까지
나를 업고 다니셨다는 할머니
저녁때가 되면 으레
고구마 옷 벗기시면서
애들아 쌀 아껴야 한다 하시던 모습
톱톱한 막걸리 한 사발같이
정이 철철 넘친다
성긴 눈발 펄럭이는 동짓날
나이 한 그릇 퍼먹는데
오매!
징허게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김정숙·시인)
+ 고구마 이삭

아내는 극성스럽다.
점심시간 한 시간의 여유에
인근 고구마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갔다.
손가락만한 작은 것 호미에 찍힌 것
어쩌다 흙 속에서 보물처럼 찾아낸
실박한 놈까지 봉투에 한가득
아내는 환한 웃음을 웃는다.

˝이만큼이면 한참은 먹겠는걸˝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큰 보물인 양
자랑하는 아내의 대견스런 모습에
그렇게 내가 한마디 거든다.
없는 살림이 그렇게 아내를
억척스럽게 만든 것 같아
늘 한쪽 마음이 시리다.

전라도 땅은 예로부터 황토배기라서
고구마가 달고도 실팍하다.
어릴 적에는 점심은 의례
고구마로 데우기 부지기수 이였다.
그 지겨웠던 고구마가 요사이는
무척 비싼 고급 주전거리가 되었다.
부지런한 아내 덕에 한동안은
맛있는 고구마를 먹게 생겼다.
그 맛있는 고구마를 생각하며
쩝쩝 입맛을 다신다.
(우보 임인규·시인이며 소설가)
+ 고구마를 캐다

송편소를 하기 위해 캔 고구마
넝쿨과 붙어있던 곳에서
눈물 같은 하얀 진액을 왈칵 쏟더니
이내 까맣게 딱지를 만들며
스스로 상처를 아물이고 있다
어미와 막 헤어진 상처,
생명창조의 흔적 배꼽이다
흠칫
첫울음이 고여 있는
나의 배꼽도 따라 욱신거리는 것이
어머니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나도 탯줄이 잘렸을 때
저 고구마처럼 스스로 상처를 말렸을까
그렇지 않다
낳아 자족하기까지 살피다 자른

또 하나의 탯줄
심장 한 편에
고구마 진액처럼 말라붙은 딱지가
가끔 신경통처럼 쑤신다.
이제 고구마를 잃은 넝쿨은
둘둘 말려 밭둑에 걸쳐 있다가 거름이 되거나
소, 말의 먹이로 쓰일 것이다
시들어 가고 있는 줄기가
쪼그라진 어머니 젖꼭지 같다
고구마를 쪘다
햇볕이 가득한 고구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스스 쏟아질 것 같은 뙤약볕
어둠 속에 저 빛을 모으기 위해
사막을 허둥댔을
어머니의 구멍 난 고무신 같은 넝쿨.
(오영록·시인, 1959-)
+ 고구마 타령

접시에 올라앉은
두루뭉수리
못생긴 전라도 고구마가
뽀루퉁한 입술 오물거리며
한 많은 노래를 부른다.

아가씨 아가씨
맘씨 고운 아가씨
대만산 바나나 대신
저희들을 먹어줘요
똥도 매끄럽게 잘 나오는
전라도 황토땅 물고구마
제일 예쁜 놈 골라
꽃잎 같은 고운 입술로
탐나게 맛있게 먹어줘요
값도 싸고 배도 부르고
저희들을 먹으면
새참 때 쪼르륵 소리도 안 나지요
털난 창자 속
굽이굽이 구절양장 찾아가서
소슬한 달빛이 될래요
어허둥둥 내 사랑
이쁜 춘향이 눈물이 될래요.

아가씨 아가씨
맘씨 고운 아가씨
미국 초콜레트 비스케트 자시지 마시고
프랑스 봉봉 과자
아메리카 흑인 핫도그 자시지 마시고
우리네 전라도 함평땅
달디단 고구마
한입에 반둥중 덥썩 물어
탐나게 맛있게 먹어줘요

오지게 신나게 먹어줘요
덥썩 깨물어줘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생켜줘요
단숨에 배꼽 밑까지
쑥 내려갈래요.

파리야 파리야
방정맞은 파리야
서러운 개떡 숭년에
건방지게 먼저 날아온 파리야
우리를 먼저 맛보지 말아라
꽃잎 같은 입술은 어디 가고
방정맞은 파리만 찾아오느냐
어진 흥부님 어디 가고
놀부네 딸년들만 퉤퉤
본체만체 돌아서느냐,

예쁘게 생긴
발그족족 살오른 함평 고구마
한입 깨물어 베어먹으니
어느새 식어버렸네.
내 참!
(문병란·시인, 1935-)
+ 고구마

일천구백 육십 년
슬그머니 어머니가 내놓은
찐 고구마 먹는 날은
저녁밥이 없었다
팍 시어버린 초승달 같은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울퉁불퉁 고구마 싫어하는 나는
먹기도 전에 먼저 목이 메어왔다
짐짓 모르는 척
물 한 그릇 건네준 어머니,
슬픔에 체하지 말아라 하셨다
제일 작은 걸로 골라먹은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내 몫의 나머지를 흙 속에 파묻었다
고구마 먹은 나무와 꽃들은
어쩜 그리 잘도 자라는지
내 머리 위에 훌쩍 올라섰고
창백한 가을처럼 나는 자꾸 쓰러졌다
그때 어머니가 건네준 고구마가
내게 약봉지 같은 것인 줄 몰랐다
일부러 밥 건너뛰고
한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한
고구마 주신 이유를 이제 알았다
삶은 고구마 껍질째 한 입 베어 물고
젓가락으로 김치 집어든 어머니
너도 어여 먹어봐라 하며
오늘도 씨알 굵은 놈 하나 던져주시니
고구마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고구마를 캐면서

넝쿨을 젖히고 거두어낸 뒤
이랑이랑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옹골지고 *오달진 덩저리가 묻힌 데마다
땅거죽이 빠각빠각 터져 있음을 보았다
맑은 햇살 아래에 드러난 뒤
굵은 것일수록 살가죽이 갈기갈기 찢겼음을 보았다

깊고 어두움의 땅 속에서
얼마나 푸르고 짙푸르게 하늘을 그려왔던가
얼마나 담차고 줄기차게 어둠과 맞서왔던가
그 동안 응어리져 살아온 탓인지
이랑이랑 끊임없이 알차게 솟구치는 열기로
고구마를 캐는 데에도 헉헉 숨이 찼다

땅이란 본래부터 비어있는 여인
봄이 비바람을 견디어야 가을이 되듯이
굳세고 질긴 피땀의 줄기로 땅을 뒤덮어 버리고
굵은 씨알을 기르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 오늘에서야
젖가슴의 그리움과 피땀의 향기, 그 차이를 알았습니다
(구재기·시인, 1950-)
*옹골지다 :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오달지다 :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 고구마 꽃

고구마는 꽃을 달고
세상에 나온 일이 없다고 합니다.

고구마는
잎과 줄기와 알몸
그뿐.
보릿고개 파묻고 자라는
뿌리에 젖줄 물려
꽃을 틔어 웃는 날은
서릿발에 밟히고
자식이 많다 보니
제 몸 가꿀 겨를이 있겠어요.
오롯이
내리막길 온몸이
붉은 숯등걸 무르익어
치매의 속살이 하얗도록
검게 타버린 세월만 캐내었지요.

이상 기후변화로
계절의 변심이 몰고 온
고구마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병동에서
고구마 꽃처럼 피었습니다.
덜컹, 과거는 여위고
현실은 덩굴에 매달려
시들어 갑니다.
이제, 당신은
파내버린 두렁마다
붉은 욕창이 한창입니다.
(최남균·시인, 1967-)
+ 군고구마

아파트 앞 신호등 곁에서
앳된 청년이 군고구마 좌판을 벌였다
드럼통 주위엔 온통 나무 타는 연기로 가득하고
이리저리 돌려 눕히며 이쑤시개로
검은 연기자국이 얼룩덜룩한 고구마의 허리 조심스레
찔러보는 청년의 얼굴도 얼룩덜룩하다
청년 앞에 놓여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세상도 아마 저렇게 매캐한 연기 투성일 게다
앞과 뒤, 깊은 속까지 적당하게 익힌다는 것이
잘 익어 먹기 좋게 된 삶을 금방 눈으로 알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생으로 불 속에 던져졌던
나도 저랬다 밤낮으로 뒤척거리며
따끈하게 익어 접힌 봉지를 열 수 있기를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 달짝지근한 발길
건널목을 건너갈 수 있기를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뜨거운 통속에서 뒹굴었다
단 한 번의 흥정도 없이
구겨진 지전 같은 겨울 벚나무 아래 주춤거리는
내 몸에선 바삭거리는 소리만 떨어지고
허리를 굽힌 손톱달이 쿡, 쿡,
숯덩이가 된 나를 찔러보고 있다
(권애숙·시인, 경북 선산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