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4일 화요일
이성선 시인의 ´문답법을 버리다´ 외
<침묵에 관한 시모음> 이성선 시인의 ´문답법을 버리다´ 외
+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나무는 말을 삼간다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동네가 시끄러우면
건너편 산으로
휘잉 새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강수성·아동문학가)
+ 말
산에 사는 산사람은
말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을
산에서 살다보니 말을 잃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듣기 좋고
피고 지는 꽃들이 보기 좋고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구름도 좋고
그 많은 것 어떻게
말로 다 하나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본다.
(정원석·시인)
+ 고요함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일본의 시인이며 생명운동가)
+ 난초 앞에서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고은·시인, 1933-)
+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정현종·시인, 1939-)
+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유안진·시인, 1941-)
+ 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문태준·시인, 1970-)
+ 묵언(默言)의 날
하루종일 입을 봉(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고진하·시인이며 목사, 1953-)
+ 침묵 수행
눈과 얼음으로
담벼락을 높이 둘러친
겨울숲이 안거에 들었다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으로 정진하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새 날아가는 소리도
멋모르고 숲속에 들어왔다가
얼어붙은 채 허공에 걸려있다
길도 끊기고
한 번 발 들이밀면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무덤 같은 곳이라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겨울숲에서는
살과 살이 붙어서내는
화로 같은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뼈와 뼈가 부딪혀내는
칼날 같은 소리를 잊어버릴 것이다
겨울숲에
한참 앉아있으면
안거 끝내고 나가는
나무가 하는 말이라든가
바위의 소리라든가
눈 깜빡거리며 들을 수 있겠다
(김종제·시인)
+ 말줄임표
글자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보았니?
글을 읽다
만난
말줄임표(……)
생각의 오솔길
걸어가고 있는 게지.
우리가
생각의 발자국
따라갈 때처럼…….
(심효숙·아동문학가, 1962-)
+ 묵언(默言)
내 나이
어느새 쉰 셋
불혹의 고개 넘은 지
오래
이제 침묵으로
말할 때가 되었다
입으로 내뱉은 말
많은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허허롭고 편치 않다
앞으로 남은
세월에는
입은 바위처럼 무겁게
귀는 대문처럼 활짝 열고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게
하루하루 살아야지
가슴속 깊이
푹 익은 얘기
말없이 눈빛으로 말해야지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준관 시인의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