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꼭 잊고 싶다면 - 김정한
나를 꼭 잊고 싶다면
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나를 꼭 지우고 싶다면
한꺼번에 삭제 버튼을 누르지 마시고
당신을 흔들어놓았던 메일을 한줄씩 지워 가시기를...
바라옵건데
조금씩 천천히 지워 가시기를...
그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허락받지 않고 당신을 사랑한 죄 밖에 없으니
가끔씩 당신이 그리우면
당신에 대한 기억 몇자락 만이라도 몰래 끄집어 내어
혼자 만이라도 웃고 또 울며 추억할 수 있게
새털 만큼 가벼운 흔적 만이라도 남겨 두시기를...
나를 꼭 잊고 싶다면
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김정한 - 에세이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