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안도현의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외


<기찻길에 관한 시 모음> 안도현의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외

+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길은 혼자서 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다.

철길은 왜 나란히 가는가?

함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늘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닥토닥 다투지 말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말고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철길은 왜 서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두면서 가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서로 등을 돌린 뒤에 생긴 모난 거리가 아니라
서로 그리워하는 둥근 거리 말이다.

철길을 따라가 보아라

철길은 절대로 90도 각도로 방향을 꺾지 않는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을 다 둘러본 뒤에 천천히
둥글게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커브를 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렇게 철길을 닮아가라.
(안도현·시인, 1961-)
+ 철길은 왜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가

철길은 서로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열차를 보내기 위해서는
철길은 서로 만나서는 안 된다
슬프지만 이대로 견딜 수밖에 없다

철길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슬프지만 철길처럼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윤수천·시인, 1942-)
+ 철길

아스라이 멀어져 갔던
내 사랑하는 이들이
숨가쁘게 씨근덕거리면서
다시,
내 곁으로
달려올 것만 같다
(정세훈·시인, 1955-)
+ 철길·3

우리는 만났다, 힘겹게
우리는 헤어졌다, 역시 힘겹게.
(나태주·시인, 1945-)
+ 가을 철길

이곳에 오면
버림받고도
병들지 못하고 사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김진성·시인, 1962-)
+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내가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하늘길 위에
그대 있습니다

멀리 있어서
정다운 이여,

사라짐으로 우리는
비로소 아름답고
떠나감으로 우리는
비로소 참답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기찻길

아무런 말도 없이
스쳐 가는 바람이라도
나란히 있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까이 가고파도
다가설 수 없고
애써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마주 보며
함께 가는 길
돌아서서 보면
한 치 오차도 없이 달려온 길

서로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먼 훗날, 소실점 끝에서라도
한 점이 될 수 있어
설레는 가슴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없다
(양해선·시인)
+ 철길을 버리며

기차가 떠났다
버리고 간
그림자만 서 있다
아니 몇 발짝 기차를 따라
움직이다가 철길 버리고
돌아서는 경험을 한다
기차의 엉덩이가
시선 속에서 작아지고 있을 때
기차의 토악질 소리에
더욱 깊어진 주름을
안고 오늘은
철길 따라 핀
사루비아 붉게 다문 입을 열고
서러운 내 속살이 조금씩
태워지듯 내 이별이 사라지고 있다
(강현옥·시인, 전북 완주 출생)
+ 기찻길 옆에는 폐가(廢家)가 있네

누가
살다 갔을까
기찻길 옆에는
폐가가 있네
낡은 기왓장
바람에 날려 다
무너지고
키 큰 글라디올러스나
키 작은 채송화가
피었음직한
먼지 자욱한
흙마당엔
잡초 우거져
밤이면
별무더기 내려와
우우 슬픈 노래
부르고 있네
어쩌다 기찻소리
시끄러워도
적막한 마당에
내가 들러
홀로
기웃거려도
도무지
투덜대는 이 없는
쓸쓸한 폐가,
내 안에
네가 살다 갔는지
네 안에
내가 살다왔는지
내 마음속의
너무 쓸쓸한 폐가,
(홍수희·시인)
+ 기찻길 옆 고물상

고물상은 대개 기찻길 옆에 있다
쫓겨난 고물들, 죽어서도 고단한 고물들
잠들만하면 기차가 들이닥쳐 깨운다
철커덕 철커덕 작두질을 하며
물은 죄를 묻고 또 묻는다

내장을 비우고 납작하게 눌린 박스포와
유효 기간이 지난 소문이 담긴 폐지들
한때는 번쩍거리는 몸의 일부였을 가볍고 무거운 쇳조각들
눈앞이 캄캄한 모니터와, 혀가 뽑힌 프린터들
얻어맞아 어금니가 빠진 선풍기 날개들

저들은 대체 어떤 비밀을 알아버린 죄로
살해되었을까 버려졌을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이젠 필요 없어, 버린 자식들

기차가 지나 간 후,
고물들은 잠시 자신들이 살다 온 곳의
죄를 떠올릴지 모른다
인간들의 살비듬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와
밥 냄새 따위를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박씨는 박스를 묶고, 김씨는 흩어진 쇳조각을 모은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태어나지 마 퇴, 침 발라가며
단단하게 염을 한다
땅바닥에는 죽은 고물들의 산더미를 훑어내린
핏물이 흥건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놈들은 재생의 용광로로 보내지거나
약간이라도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따로 모아졌다가
새 주인을 만나러 가겠지

하지만 한 번 죽거나 버려진 고물들은
다시는 살고 싶지 않다 누구에겐가 가고 싶지 않다
재생이 싫다 부활이 죽어도 싫다
부글부글 끓이든 이글이글 녹이든
다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을 뿐이다
천당도 지옥도 없이

기찻길 옆에는 대개 고물상이 있다
(정병근·시인, 1962-)
+ 기찻길

보일 듯 말듯
아득히 먼 저곳까지

함께 곧거나
함께 굽으며

나란히 마주선
기찻길을 보며

왜 바보 같이
눈물이 나는 걸까

나의 발길이 닿는
세상의 모든 길이

쓸쓸하게만 느껴지며
방황하던 내 청춘에

햇살처럼 다가와
따스한 사랑을 주고

스물 몇 해의 긴 세월
한결같이 나의 ´곁´이 되어 준

참 고마운 당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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