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박상천의 시 ´땅·1´ 외
<땅에 관한 시 모음> 박상천의 시 ´땅·1´ 외
+ 땅·1
달리는 일이 헛된
스펀지 같은 세상에 살며
정직한,
튼튼한 땅을 생각한다.
발로 민 힘만큼 정직하게
속이지 않고,
그 힘만큼 받쳐주는 튼튼한 땅을 생각한다.
달리는 것이 헛되지 않는,
온몸으로 달리는 이들을 받쳐주는
굳은 땅을 생각한다.
(박상천·시인, 1955-)
+ 땅
물은
퍼낸 자릴
얼른 메우지만
빛은
어둠을
금방금방 퍼내지만
땅은
구덩이를
그대로 둔다.
빗물이 쉬었다 가게
낙엽이 누었다 가게
어머니 품속처럼 오래오래 비워 둔다.
(김종순·아동문학가)
+ 하늘과 땅
나는 나를 반 평 남짓한 바윗돌에 예비시체로 눕힌다
조금도 춥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불평을 입에 담지 않는다
누어보면 수십만 평의 하늘이 어머니 가슴처럼
아내 가슴처럼 수많은 인정처럼 펼쳐진 하늘
비로소 죽음은 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비훈련을 마친다
언제고 부르면 가겠다
(이생진·시인, 1929-)
+ 땅바닥에
땅바닥에 알몸뚱이로 엎드려 떨고 떠느라고
입술도 떨어져 나가고 머리칼도 눈썹도 죄 뽑혀나간
냉이, 겨우 앙가슴만 앙상히 남은 냉이,
그건 또 하나 슬프디슬픈 우리 누이들의 분신.
(나태주·시인, 1945-)
+ 천하 명당
산골은 산골대로
갯벌은 갯벌대로
들녘은 들녘대로
장터는 장터대로
봄날의 패랭이꽃
여름의 한삼넝쿨
가을의 똘감나무
겨울의 가시탱자
달개비야, 달개비야
여울가의 달개비야
자네들이 사는 곳이
천하의 명당일세
농부의 쟁기도
어부의 그물도
대장간의 풀무도
들병지기 호리병도
자네들이
있는 곳이
천하의
명당일세
(임보·시인, 1940-)
+ 땅
태초에 하나님 가라사대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었고
그후,
속절없이 하나님 가라사대
땅 위에 충만하라 하니
복부인, 복남편, 복자식
모두 나와 복덕방에서
땅 따먹기 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임희구·시인, 1965-)
+ 비 온 뒤엔 땅도 몸살을 앓는다
비 온 뒤엔 땅도 몸이 붓는다
조금만 건드려도 껍질이 벗겨지고
헤진 상처에서 피가 난다
푸석푸석 핏기 없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무도 살짝 발꿈치를 들어올려 제 키를 키우고
땅을 배고 누워 있던 길들도 일어나 앉으려
꿈틀꿈틀 허리를 뒤튼다
살들이 불어난 저수지는
땅에게 퉁퉁 불어터지도록
젖꼭지를 물려준다
비 온 뒤엔 땅을 밟는 모든 시간도
발목이 부어있다
부운 발목을 감는 붕대처럼 바람도 조심스레
제 몸을 모두 비워 공중으로만 불어댄다
비 온 뒤엔 땅도
몸살을 앓는다
(김시탁·시인, 1963-)
+ 땅 한 평만 빌려다오
너 살고 있는 하늘 아래
나 살고자 한다
나에게 빈땅 말고
옆구리땅 한 평만 빌려다오
어느 날
네 가슴에 비 내리면
그 비를 다 맞고 있을 테니
햇빛 좋은 날
나를 벗겨 말려다오
네 하늘의 운명대로
나는 비를 맞고 눈을 맞고
전신이 젖어와도
가슴에 타는 불 꺼트리지 않은 테니
너의 숨소리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늑막으로 살게 해 다오
(강재현·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바다와 땅
바다에는
헤엄쳐 가는 길이 안 보이는데
물고기들은 잘도 돌아다닌다.
땅에는 길도 많고 말도 많고
이 길로,
저 길로,
가야 한다고
한다.
물 속에는
길이 없어도
어디든지 간다.
물 속에는
문도,
큰 길도
없었다.
(강월도·시인, 1936-2002)
+ 하늘과 땅
땅에서 뒹굴기만 하던
굼벵이
땅바닥에서 기기만 하던
지렁이
날개가 나서 날아다닌다면
기분이 참 좋을 거야
너무 좋아 죽을 거야
하늘을 날던 잠자리
하늘을 훨훨 날던 새
날개가 퇴화되어
땅바닥에 기어다닌다면
기분이 더러울 거야
죽고만 싶을 거야
인생의 무대에선
이런 일은 다반사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지
인생은 새옹지마
너무 기뻐도 말고
너무 슬퍼도 마세나.
(이문조·시인)
+ 땅 끝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 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 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 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나희덕·시인, 1966-)
+ 하늘과 땅의 입맞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지만
언제나 입술처럼 맞물려있네.
안개 피어나고 구름 떠가는 일
말없는 사랑의 증거들이라네.
하늘과 땅의 입맞춤으로
세상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사랑이
땅 위 하늘 아래 가득 차있네.
꽃 피고 새 우는 일, 또는
나 여기 있고 그대 거기 있는 일
어느 하나 입맞춤 아닌 게 없네.
말씀마다 꽃향기 아닌 게 없네.
(정진명·시인)
+ 땅의 평화
땅은 평화입니다.
땅의 마음은 평화입니다.
하늘보다 큰 마음
바다보다 푸른 마음
태양보다 뜨거운 마음
땅의 마음은 평화입니다.
땅과 입을 맞추며
발바닥은 부끄럽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것 무엇 하나 마다 않고
받아 마시며 피워내는 풀꽃들
발바닥은 부끄럽습니다.
활이 아닙니다.
칼도 창도 아닙니다.
기관총도 대포도 탱크도 아닙니다.
핵무기 전자무기가 문제입니다.
그 가공할 살인무기를 만드는 손들
그 단추를 누르는 것이 자랑스러운 손가락들
발바닥은 분노합니다.
위대한 인류의 위대한 문명의 그늘 아래서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발바닥은 아프고 쓰립니다.
활이 아닙니다.
칼도 창도 아닙니다.
기관총도 대포도 탱크도 아닙니다.
핵무기도 전자무기도 아닙니다.
평화가 문제입니다.
하나도 평화, 둘도 평화, 셋도 평화입니다.
은하성운 밖으로 밀려나는 평화를 보며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평화를 애타게 바라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입니다.
땅을 딛고 서서
발바닥은 불이 됩니다. 몸은 선 채로 타는 제물이 됩니다.
(문익환·목사 시인, 1918-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동묵의 ´꼭 가야 하는 길´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