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회상

계산할 때
언제나 뒤에서 기다려주던 아이
돈 없을 때 내 표정을 읽고
전표 먼저 잡는 사람이 내는 거라며
잽싸게 전표 잡던 아이
내 친구와 같이 만나기로 했을 때
내가 늦으면 친구가 주문하래도
올 때까지 기다려주던 아이
연시 좋아한다고 봄에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가을에 바나나까지 사들고 와 먹여주던 아이
예쁜 귀걸이가 눈에 띄어 억지로 사주면
너무나 고마워하고 너무나 잘 어울리던 아이
그 사람 많은 토요일 오후
명동 골목골목을 몇 시간이고 걸어다녀도
짜증은 커녕 시간이 너무 빠르단 생각을 들게 해 주던 아이
숨막히게 더운 여름날
내가 번 돈으로 성년의 생일을 차려주고 싶어
행복한 마음으로 막일하게 만들던 아이
부슬부슬 여름비가 내리던 날
노동판에 찾아와 눈물 글썽이며 다친 데 없지 묻고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만나겠다 하던 아이
날 한 번도 화나게 한 적이 없으면서
가끔 미안하다 하던 아이
내가 감기로 고생하면 자기 폐렴 걸린 사람처럼
더 아파해 알아서 병원 가게 하던 아이
술 취해 전화 거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술 취해 전화 걸어 헛소리 한 것 같은데
아침에 찾아와 해장국 사 주며
실수한 거 없고 하고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이젠 안 그럴거지 하던 아이
반찬은 잘 안 먹는 내 버릇을 알고 수저에 반찬 올려주는
그런데도 닭살은커녕 한 그릇 더 먹게 하던 아이
마른안주 시키면 먹기 좋게 찢어 주던 아이
평소에는 김미숙 같은 분위기로
나이트나 가라오케 가면 김완선보다 날리던 아이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으면서
우리 갑순이를 질투날 정도로
사랑스럽게 안아주고
한참 있다 얼굴에 뽀록뽀록 뭐가 나와도
더 예쁘게 보이던 아이
그 큰 키로 행진하는 군인처럼
왼팔을 휘적휘적 흔들며 걸어도
귀엽게만 보이던 아이
핏자나 하이라이스 체리펀치를 좋아하면서도
감자전을 잘 부치고 강냉이를 즐겨먹던 아이
부모님이 여름휴가 떠나셨다고
날 집에 초대하고 싶다던 철없던 아이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에
망설여지지도 창피하지도 않게 하던 아이
착한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던 아이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려준 아이 그때
그때가 무척이나 그리워지게 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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