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함민복의 ´물´ 외


<물 시 모음> 함민복의 ´물´ 외

+ 물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함민복·시인, 1962-)
+ 물·1

물이 물을 껴안고 간다
불쌍한 맨몸끼리 껴안고 흐르는
물과 물들을 본다
모든 옷 같은 것일랑 벗어버린 채
대낮에도 저렇게 투명한 물은 물끼리
서로 그러안고 한데 흐르는 것이다
물이 물로서 보이는 것은
저만큼 속살까지 내보이기 때문일까
솔바람처럼 서늘한 마음으로
서로가 껴안고 흐르는 목숨을 본다
(이정우·신부 시인, 1946-)
+ 맹물

하긴 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좋은 물은 무미(無味)한 맹물이지요.
아무 맛도 없는 게 맹물이지.
맹물은 날마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꿀물은 달지만 그렇게 마실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가끔 먹는 것을 귀하다 하고
매일 먹는 것은 별로
귀한 줄 모르거든요.
(장일순·시민운동가, 1928-1994)
+ 물처럼 흐르라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해지지 않는다.

물은 한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강물처럼 어디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법정·스님, 1932-2010)
+ 물에 베이다

얼마나 두드렸을까 저 돌의 여문 심장
빗물받이 돌 팍 위에 움푹하게 패인 흔적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 오래된 가슴의 통증.
(전정희·시조시인, 1957-)
+ 물의 칼

대장간의 화덕에서 벼린 굳은 쇠붙이만이
예리한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로 가슴을 베인 적이 없는가?

해협을 향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의 모서리가 아니라

몇 방울의 물

두 안구를 적시며 흐르는
가는 눈물방울도

사람의 가슴을 베는 칼이 된다.
(임보·시인, 1940-)
+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강이라는 말도 사랑하고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이름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 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전봉건·시인, 1928-1988)
+ 내가 물이라면

내가 물이라면
그대의 마음 골짜기로 흐르는
정화수가 되고 싶습니다

흐르고 흐르다
설혹
수많은 돌부리와 부딪히어
아픈 기억을 남기는
길이라 해도

기쁨과 슬픔이 고여 있는
그대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하는 물이고 싶습니다

살다가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대, 힘겨울 때

나,
그대 마음 숲에서
맑은 호수로 고여
당신 쉬어가는
안식처이고 싶습니다
(김옥자·시인)
+ 물

얼음 속에 갇혔다 빠져나온 물은
실눈을 뜨고 살며시 대지에 스민다.
스며선 뿔뿔이 흩어지는 물
네덜란드의 둑으로도 가고
백두산 천지로도 기어오른다.
마나과의 지진 터
그 폐허를 찾아가서는
늙은 겨울의
해진 구두 밑창을 적시는 물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줄기는 엉뚱하게
내 혈관 속으로 기어든다.
겨우내 검게 응어리진 피를 풀자는 뜻인가
그래서 나를
슬픔을 다는 저울침의 눈금처럼
파들거리게 하자는 뜻인가
쳐다보면 뿌연 하늘
하늘에도 벌써 물 한 줄기 스며들었고나!
(이형기·시인, 1933-2005)
+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도종환·시인, 1954-)
+ 물의 세상

남해 거문도쯤에서
한 40분만 바다로 달려나가 보면
이 세상은 뭍[陸]이 아니라
물[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상의 7할이 물로 뒤덮여 있고
바다의 깊이가 산들의 높이보다 더하니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
하나의 큰 물방울―푸른 수국(水國)이다.
거친 바다의 물결을 가르며
날듯이 헤엄쳐 가는 저 상어의 무리들을 보라
엔진도 프로펠러도 달지 않았지만
그들은 얼마나 눈부시게 비상하는가
물나라의 왕자들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다.
뭍에 붙어사는 생명들은 한갓 더부살이일 뿐
지상에 군림하는 간악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강자라고?
물 속의 세상에선 단 몇 분도 맨몸으로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무리들일 뿐
너희는 이 세상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불량배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상의 주인은 비늘 번득이는 어족(魚族)들
이 세상의 황제는 수궁(水宮)에 있다.
(임보·시인, 194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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