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일요일

이향지의 ´시월 이야기´ 외


<10월에 관한 시 모음> 이향지의 ´시월 이야기´ 외

+ 시월 이야기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이향지·시인, 1942-)
+ 시월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의
발성(發聲)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임보·시인, 1940-)
+ 시월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피천득·수필가, 1910-2007)
+ 시월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목필균·시인)
+ 시월의 장미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을 맞으며
똑똑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나호열·시인, 1953-)
+ 10월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오세영·시인, 1942-)
+ 10월은

시월은
내 고향이다
문을 열면
황토빛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엔
국화꽃 같은 구름
국화향 가득한 바람이 불고

시월은
내 그리움이다
시린 햇살 닮은 모습으로
먼 곳의 기차를 탄 얼굴
마음밭을 서성이다
생각의 갈피마다 안주하는

시월은
언제나 행복을 꿈꾸는
내 고향이다.
(박현자·시인, 경기도 양평 출생)
+ 시월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이문재·시인, 1959-)
+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문태준·시인, 1970-)
+ 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최원정·시인)
+ 음력 시월

음력 시월을 이르는 말에
소춘 小春,
양월 良月,
응종 應鐘,
방동 方冬,
상동 上冬,
이렇듯 여러 말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갑자기 추웠다가
다시 따뜻해지는 작은 봄에
이렇듯 여러 이름이 있는 이유가 있을 터이어서요
나는 내 아내의 모든 병이 낫고
새로 찾아온 봄을 두고

오래 오래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김영천·시인, 1948-)
+ 시월, 초사흘

누가 던져놓았나, 길 없는
하늘중천에
막내고모 눈썹 같은 초승달

달빛에 야윈
미루나무 꼭대기에 서너 장
봉함엽서 떨고있네.

흰 눈발 서성이면
덧나던 그리움도, 기우뚱
헛발 딛는 초저녁
(류제희·시인)
+ 시월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은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로버트 프로스트·미국 시인, 1874-196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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