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6일 수요일

사람의 선성(善性)과 아름다움을 묵상함 - 함민복의 ´성선설´ 외 11편의 시


사람의 선성(善性)과 아름다움을 묵상함
- 함민복의 ´성선설´ 외 11편의 시
+ 성선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시인, 1962-)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릴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기철·시인, 1943-)
+ 채송화에게는

베란다에서 키우는 작은 채송화
나를 하느님인 줄 안다

비 좀 내려 주세요
바람 좀 불게 해 주세요

가끔 나타나
물조리개로 흠뻑
비도 내려 주고

창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도 불게 하는
채송화에게는 내가 하느님이다
(신복순·아동문학가)
+ 체온의 시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스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문정희·시인, 1947-)
+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숫자에 밝지 못해도
어려운 공식을 외우지 못해도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외국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해도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인류의 시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몰라도
색깔 다른 콩 두 개가
어떤 모양의 콩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어도
아름드리 나무를 안아보고
놀랄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조각칼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해도
하늘의 구름이 무슨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하나 없어도
새와 함께 휘파람을 불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돈 세는 것이 서툴고,
물정에 어수룩해도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줄 서기를 잘 못해서
매번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럴싸한 말로 다른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해도
세상의 주인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글쓰기를 조금 못해도
책 읽기가 조금 서툴어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뜻을 물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기보다
용서해줄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반대하는´ 특기를 갖기보다
´찬성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서로 믿어주고,
서로 희망이 되어주고
서로 사랑할 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을 닮았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철·신부)
+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께서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밖에는

그분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하여
이 세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발로 세상을 다니시며
선을 행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이 그분의 손이며
당신의 발이 그분의 발이며
당신의 눈이 그분의 눈이며
당신이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께서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밖에는

그분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하여
이 세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아빌라의 성 테레사·스페인 태생의 신비가, 1515-1582)
+ 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여기 여기 존재한다.
(구상·시인, 1919-2004)
+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햇빛과 바람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턱수염을 밀어주는
이발사가 되고 싶다.

비록 내 가위질은 서툴겠지만,
나귀처럼 가위는
스프링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의 삶을 위로해 주는 말을
속삭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에서
처음 읽었던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허름한 액자에 걸려 있던 시.

삶은 끝내 가난한 그들을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세평 좁은 이발소에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수증기 뽀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처럼 하얀 성탄절의 눈을
기다리겠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의 머리를
聖誕木처럼
아름답게 깎고 다듬어 주겠다.
(이준관·시인, 1949)
+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윗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한다든지
아니
영원히 언제까지나 한다든지, 어찌됐든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참 좋은 일이다.
(이선관·시인, 1942-2005)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늙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란시스 잠·프랑스 시인, 1868-1938)
+ 예쁜 마음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생명과 생명이 서로 기대어
한세상 어우러지는 것

살아가는 일은 만만하지 않아
한숨도 나오고 눈물도 흐르는 것

때로 상처 입고 때로 상처를 입히며
눈 흘기는 인생살이 속에서도

미움과 무관심보다는 사랑과 인정(人情)이
더 크고 많은 것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은 없어도
고달픈 생명 하나 품어 주고픈

예쁜 마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상은 살아갈 만한 것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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