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5일 월요일

설태수의 ´죽음이란´


<죽음을 묵상하는 시 모음> 설태수의 ´죽음이란´

+ 죽음이란

갓난아이 땐 엄마의 젖을
커서는 지상의 젖을
´주우욱´ 빨다가
이윽고 때가 되어
´음´ 하고 입을 다무니
이승의 젖을 다 빨아먹었다는 것.
그리하여 한평생 먹어둔 힘으로
떠난다는 것.
연료탱크를 떨구며
지구를 벗어나는 우주선처럼
눈물과 살을 버려둔 채
가벼이 영혼만으로
아득히 떠난다는 것.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설태수·시인, 1954-)
+ 해 지는 쪽으로

해 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
들판에 꽃잎은 시들고.

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박정만·시인, 1946-1988)
+ 나의 죽음

나는 내 발걸음에 취했다
내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바다──, 그러나 내가 두고 온 그 백사장에서는 빈
구덩이만이 무성하여
내 귀는 지하를 듣고 있다
누군가 나를 낮은 포복으로 건너고 있다
이 물소리,
나의 죽음
(함성호·건축가 시인, 1963-)
+ 목숨

이슬을 밟고
산 위에 오르니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얼마나 사나?
―아침해가 떠오르기까지.

등성이엔
무더기로 핀
들꽃이 곱다.

―들꽃은 얼마나 사나?
―따가운 볕살 쬐이기까지.

안개는 사라지고
들꽃은 시들고

―나는 얼마나 사나?
―안개만큼
저 들꽃만큼
(신창호·시인)
+ 죽음을 위한 서시

나의 삶에서 가장 의미 깊게 생각되는 말
˝죽음˝
나의 삶에서 가장 가슴 깊게 느껴오는 말
˝죽음˝
나의 삶에서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말
˝죽음˝
나의 삶에서 옹골차게 가꾸고 싶은 말
˝죽음˝
나의 삶에서 기쁘게 맞고픈 말
˝죽음˝
나의 삶에서 다시 보고 또 다시 봐도 새로운 말
˝죽음˝

˝이 죽음이 나의 문을 두드릴 때
나는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결코 남루하고 비루한 삶의 뜨락은 주지 않으리라
정렬된 내면의 세계,
고독과 침묵으로 가꾸던 삶의 뜨락
정열로서 옹골차게 가꾸었던 삶의 뜨락을 바치리라

˝이 죽음이 나의 문을 두드릴 때
나는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슬픔의 눈물이 아닌
레코드 바늘을 올려놓는 마음으로
헨델의 ´메시아´를 올리며 기쁨으로
기쁨의 눈물을 바치리라
(박진옥·시인)
+ 내 작은 비애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 달콤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버릴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
아침 이슬이라도 되는데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슬펐다.
딱 한철 푸른 잎으로 파릇파릇 살거나
빨강 보라 노랑 꽃잎으로 살거나
출렁 한 가지 열매로 열렸다가
지상의 치마 속으로 쏘옥 떨어져 안기는
한아름 기쁨일 수 없는지 그것이 가끔 아쉬웠다.
(박라연·시인, 1951-)
+ 물빛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종기·시인, 1939-)
+ 먼지

우리는 먼지가 만들어낸 존재다
연애라는 먼지 햇볕이라는 먼지
굽은 등에 들러붙은 모멸 섞인 시선이라는 먼지

그래서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세고 먼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먼지투성이인 현관문을 나선다
당신과 잠깐 나눠 가졌던 입술도
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뜨거움도 식으면 먼지가 되고
세상이 정전되어 털썩 주저앉을 때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도 먼지다

그러니까 칠 년이나 산 집에
먼지만 가득하다 상심하지 말아다오

밤새 곤히 자고 일어나면
우리가 남긴 것도 뿌연 먼지뿐
아무것도 아닌 먼지 탈탈 털어보면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
또 돌아가게 될 미래다
하늘을 떠가는 뭉게구름,
불타는 별이다

당신 옷깃에 묻은 먼지가 바로 나다
(황규관·시인)
+ 죽음의 시간들

수많은 나에게 염을 띄웁니다.
죽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 시간을 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나의 죽음에 손 내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죽음을 위하여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릅니다.
죽음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에 대하여
모두에게 살금살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서로를 염하면서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들
알고 계십니까?
검은 커튼을 들고
저 사막의 폭풍 속으로 달려 보세요.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게 될 것입니다.
죽어버린 시간 속에서 염을 띄우고 있습니다.
나의 주검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나의 주검에 경이를 압니까?
자신만이 그 경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타인만이 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나, 영혼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처음과 끝을 염하려고 합니다.
나의 영혼 앞에 염을 띄우며
죽음의 시간을 접습니다.
비웃음을 보기도 침을 뱉어버리기도 합니다.
나의 죽음이
살아 있는 영혼들에게
우체부로부터 배달된
오랜 친구의 가을 편지 같다면 좋겠습니다.
(김형효·시인, 1965-)


+ 행복한 죽음

젊은 나이로 죽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다
푸른 줄기로 빛나는 나무처럼
싱싱한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

오래 산다는 것이
자칫 허물만을
남기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떠남은 행복이다

저 누추한 얼굴들을 보아라
추한 무덤들을 보아라
살았어도 산 게 아닌
가엾은 사람들을 보아라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것은
오히려 고맙다
그럴 수 없는 게
다만 아쉬울 뿐
(윤수천·시인, 194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윤동주의 ´자화상´ 외 "> 윤수천의 ´소금 같은 이야기 몇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