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0일 토요일
윤동주의 ´가을밤´ 외
<가을밤에 관한 시 모음> 윤동주의 ´가을밤´ 외
+ 가을밤
궂은비 나리는 가을밤
벌거숭이 그대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그리고 서서
아이인 양하고
솨─ 오줌을 쏘오.
(윤동주·시인, 1917-1945)
+ 가을밤
귀뚜라미여,
잠시
울음을
그쳐다오
시방
하느님께서
바늘귀를
꿰시는 중이다
보름달
커다란 복판을
질러가는
기
러
기
떼
(이해완·시인)
+ 가을밤
때로는.
죽도록 얄밉고
죽을 만치 그립다
탁 트여.
넓고 허한 가슴.
높고 푸른
저
가을 하늘 침묵 속에
사늘한 달빛
(하영순·시인)
+ 가을밤
언어가 시를 버리고
시가 시인을 버린 채
사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책갈피 속 낙엽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밤.
내 영혼의 퓨즈가 나가
삶이 정전된 밤.
(김시탁·시인, 경북 봉화 출생)
+ 가을밤 2
귀뚜라미는 만물이 쓸쓸해하는 가을밤 속을
씩씩하고 우렁찬 노래 소리로 가득 채운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
귀뚜라미 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밤.
(황인숙·시인, 1958-)
+ 가을밤
휘파람을 불며 불며 기러기들이
보름달을 향해 날아가더니
보름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보름달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정호승·시인, 1950-)
+ 가을밤
풀 섶엔
수정처럼 맑은 풀벌레소리
뜰 아랜
쏟아지는 달빛 그리움
낙엽은
잊혀진 사랑이 서러워 방황하는데
외로움이
찬 이슬 되어 가슴을 적신다.
(김의중·시인)
+ 가을밤 서정
고요 속에 일렁이는 풍경소리
서안을 미뤄 놓고 지게문을 열어 보니
무언가를 뜯어보며 짖는 삽살개
삽작문 밖 어느 벗님이라도 왔는지
하얀 달 그림자를 보고는 또 짖는지
그냥 어둠이 깔려 알 길이 없구나
내쳐 나가 연 가게 집 있으면
쓴 술 한 병이라도 받아다
벗님 불러 너스레나 한 상 차려볼거나
아이들이 새근새근 곤히 자는 밤
어느새 달은 머귀나무 사이로 지고
세속의 젓가락 소리마저 잠이 들었는데
(최범영·시인, 1958-)
+ 가을밤 비
달님이랑
해님이랑
사랑하자 사랑하여
별 하나 낳자는 언약
그 언약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던 밤,
갇혔던 말/말/말/말들
취중에 울컥울컥 토해내 듯
하혈을 한다.
좔좔좔...
낼
온 산에
핏빛, 낭자하것다.
(이복란·시인)
+ 가을밤
제비가 떠나던 날
먹물 같은 연못에
보름달이 박혔다.
이슬 맞은 감잎이
달 위에 몸을 뉘이자
소름 돋는 달빛이
으스스 몸을 떤다.
귀뚜라미 울음 그치고
오늘밤에 달이 얼면
돌아선 그대 창가에도
서릿발이 돋으려나.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가을밤
바람이 문을 흔들면
유년(幼年)의 기억도 덩달아
문고리를 붙들고
덜컹거린다.
십리 길을 걷지 못해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 가던 길
풀매질하며
쫓아오는 아이들,
쪽달도 따라오며 놀려댄다.
창 밖, 하늘을 보면
왈칵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
어머니 등에
문신(文身)으로
박힌다.
(서혜미·시인, 충남 서산 출생)
+ 가을밤은 .....
친구야
어젯밤 구암공원에 갔는데
들어주는 사람 없어도
풀벌레는 밤을 지새웠고
가을 바람이 잎사귀를
살며시 흔들었으며
수다스럽던 참새들마저
침묵을 지켰지
때늦은 장미가 미소를 접었으며
가로등 눈동자가 어둠을 밀어낼 때
떠오르던 달덩이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기에
내가 꺼내 주며
나의 소망도 들어줘야 해 하고
소망을 빌었지
좋은 작품 탐나는 작품
세기에 남을 그림 국보로 남겨질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더니
욕심이 과하다며 마음을 비우라 하더군
(최다원·화가 시인)
+ 가을밤의 정사(情事)
가로등이 졸고 있는 시간
낙엽은 바람과 속삭이고
여느 때처럼
바람둥이 나무는 옷을 벗는다
고혹한 손길을 받은
향 짙은 가을밤 정취에
지나는 행인도 숨을 멈추고
뒤돌아 누운 도로에 낙엽이 쌓일 때면
10월의 하루는 정사(情事)를 끝마친다
애절한 몸짓으로 밤을 삼키며
하나 둘씩 끌어안던
길가의 연인들 흔적도 사라지고
밤은 가고 가을이 가고 사랑도 간다
부질없는 연민 속에
세월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노예처럼 10월의 밤은 팔려 가고 있다
(김춘경·시인, 1961-)
+ 가을밤에
여옥이, 주영이, 순집이, 연진이, 진수, 금아, 정아, 순자, 복희, 설아, 영희, 둘순이, 둘자, 판숙이, 판점이, 점순이, 순옥이, 춘자, 일남이, 명희, 선옥이, 필선이, 소옥이, 귀연이, 명금이, 옥심이, 계숙이, 은하, 진희, 봉순이, 옥연이, 미숙이, 영숙이, 숙자, 우정이, 인순이, 갑님이, 선이, 성희, 영아…….
가을 밤, 귀뚜라미가 출석을 부른다. 출석부에 없는 이름들을 부른다.
(손광세·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