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4일 토요일
이기철의 ´백지의 꿈´ 외
<자아 성찰의 시모음> 이기철의 ´백지의 꿈´ 외
+ 백지의 꿈
새봄의 개나리향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씀바귀 위에 내리는 이슬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처음 가 본 길처럼 설레는 마음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유리창에 부딪친 그날의 첫 햇빛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어떤 화염에도 타지 않는 금결의 말 말고는
아물면 보석이 되는 상처 말고는
잊혀져도 맹서로 남는 사랑 말고는
날아가도 꽃이 되는 씨앗 말고는
(이기철·시인, 1943-)
+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들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의 여울은......
(도종환·시인, 1954-)
+ 내가 가장 아프단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았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시인, 1941-)
+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 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나는 순수한가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박노해·시인, 1958-)
+ 세상의 중심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감추고
알록달록 나들이 왔다고
터진 발을 감춘다
(나호열·시인, 1953-)
+ 무지렁이
무지렁이 . 무지렁이 . 무지렁이
어디에 쓸까 무엇에 쓸까
쓸만한 것 꺼내어 볼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지렁이 . 무지렁이 . 무지렁이
없네 . 없네 . 없네 .
내 속에 있는 것 모두 쓴 물뿐 쓴 뿌리뿐
언제 다 비워 낼까 언제 다 뽑아 낼까
무지렁이 무지렁이 . 무지렁이
퍼내면 다시 고이고
뽑고 돌아서면 다시 돋아나는
내 안의 쓰디쓴 근원적인 독(毒)이여
(송해월·시인)
+ 수배전단을 보고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生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윤성택·시인, 1972-)
+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장석남·시인, 1965-)
+ 나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김광규·시인, 1941-)
+ 아무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신현림·시인, 1961-)
+ 모기장 동물원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
책을 덮고 생각중이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는가
바깥쪽에 있는가
(안도현·시인, 1961-)
+ 녹슨 못을 보았다. 나는
길을 가다 문득
녹슨 못 하나 보았다
얼마나 거기 오래 있었을까
벌겋게 시간 속을 삭고 있다. 허리는 꺾인 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게다
손바닥에 올려본 못은 세월의 부스러기들
비늘처럼 털어 내며
허리는 이내 부러질 듯하다
순간 나도 온몸의 살들 떨어져나가고
녹슨 못처럼 뼈만 앙상히 남는다
언젠가 저 못처럼 뼈마저 삭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을
허우적거리며 오늘도 바삐
가고 있다
(송진환·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노원호의 ´행복한 일´ 외 "> 김선태의 ´곡선의 말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