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4일 토요일

정환웅의 ´시인의 일상´ 외


<시인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환웅의 ´시인의 일상´ 외

+ 시인의 일상

갖는 것은 즐거움
버리는 것은 상쾌함

즐거움을 누린 만큼
쾌감도 느껴야만 한다.

스스로를 비우는 자는 상쾌하다.
내 몸 안의 숙변을 뿜어내듯이,

스스로 버리지 못한 욕심
곽 막힌 체증과도 같다.

담는 즐거움
덜어내는 상쾌함

내 안에만 머무를 때
돈도, 지식도, 음식도 썩고 만다.

먹는 것은 즐거움
배설하는 것은 쾌감

담았을 때의 쾌감만큼
비우는 즐거움을 누리자.

세상 만물 내 안에 담았다가
즐겁게 내어주는 큰 그릇이 되자.
즐거움이 나에게서 상쾌하게 넘치게 하자.

우주의 만물은 모두
즐겁게
상쾌하게
흘러야 맛이다.

오! 나의 하느님!
오늘도
상쾌하게 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정환웅·시인)
+ 시인은

시인의 마음은 모두 아름답다.

시인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지 않는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눈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시인은 세상의 아픔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
시인은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가슴이 있다.

시인의 마음엔 굴레가 없다.
시인의 대화는 영혼의 대화이다
시인의 소리는 자연의 섭리이다
시인의 가슴엔 본향이 숨쉬고 있다

시인의 마음엔 멈춤이 없다
시인은 시인의 길을 오늘도 걸어간다
누군가 곁에 없다 해도
홀로, 저 홀로
(배현순·시인)
+ 시인은 농부가 되리

한 평도 안 되는
밭을 가진
시인은
가슴속에서 잔돌을
골라내야 하리

씨뿌릴 둔덕을 돋우어 놓고
고랑을 깊게 파고
시간마다
제 살과 뼈를 드나들면서
순결한 땅을 만들기 위해
거름을 주어야 하리

시어를 심어
시를 탄생시키고
알차고 실한 시를 주렁주렁 열리어
풍년을 노래해야 하리

시인은 농부가 되어
뿌리 깊이 박힌
아집과 고집의 바위를 매일 흔들어
위에서 내리는 빗물과
속에서 흘리는 눈물로
돌뿌리 적셔
뽑아내야 하리
(함영숙·재미 시인)
+ 시인 본색(本色)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시인, 1945-)
+ 시인·2

암자에서 종이 운다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는 것은
종이 속으로 울기 때문이라네
외부의 충격에 겉으로 맞서는 소리라면
그것은 종소리가 아닌 쇳소리일 뿐

종은 문득 가슴으로 깨어나
내부로 향하는 소리로 가슴 소리를 내고
그 소리로 다시 가슴을 쳐 울음을 낸다네

그렇게 종이 울면
큰 산도
따라 울어
큰 산도
종이 되어주어

종소리는 멀리 퍼져 나아간다네
(함민복·시인, 1962-)
+ 당신의 초상 - 詩人

늘 홀로 슬픈 일만 생각하는 당신
가장 아픈 것에서 꽃을 찾고
병이 사랑인 가슴,

슬픔이 모국인 당신의 노래
푸른 새의 길이 되어
오늘도 아픈 가로수에 와 앉아
밤새 기침을 같이 하시다.

살아서 죽어있던
죽어서 살아있는
아니, 죽어서도 기침만 하는
저 마른 십자목 위의 별,

이 밤도 시대의 투병기를 쓰고 계시다.
(김영호·시인, 1945-)
+ 가난한 시인

가난한 시인이 펴낸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는다.
가난은 영광도 자존도 아니건만
흠모도 희망도 아니건만
가난을 훈장처럼 달아주고
참아가라고 달랜다.
저희는 가난에 총질하면서도
가난한 시인보고는
가난해야 시를 쓰는 것처럼
슬픈 방법으로 위로한다.
아무 소리 않고 참는 입에선
시만 나온다.

가난을 이야기할 사이 없이
시간이 아까워서 시만 읽는다.
가난한 시인이 쓴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을 때
서로 형제처럼 동정이 가서
눈물이 시 되어 읽는다.
(이생진·시인, 1929-)
+ 시인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매미는
제 외로움을 온 천하에 외치고 다녔네

해 밝으면 곧 날아갈 슬픔을
비는 너무 많은 눈물로 뿌리고 다녔네

아무데나 짖어대는 저 개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그렇게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그 바람에 새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지나쳐 왔네

저녁이 오기도 전에 바위는
서둘러 제 몸을 닫아버렸네
입만 꾹 다물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붙잡던 손길 다 뿌리치고
물은 아래로 저 아래로 한정 없이 흘러가고 있네

천둥의 잘못은 너무 큰 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은 것이네

시인의 잘못은 제 가난을 밑천으로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른 것이네.
(최영철·시인, 1956-)
+ 시인추방

그는 열변을 토했다
자장면집이 너무 많다
태화루, 중화루, 만리장성이 모두 어렵다
너도 나도 칼국수집, 추어탕집, 순대국집을 내면
너도 못살고 나도 못산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 사람은 결국 차기에 낙선했다

요새는 시인이 너무 많다
몇 명만 남기고 모두 추방하자
그러면 시집은 잘 팔리고
시인도 저명한 정치가와 둘러앉아 만찬을 할 것이다
삼십 명만 남겨놓자
그만큼만 남겨서 정부정책 나팔수로 삼자
그러면 인천은 아마 시인 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나는 독재자 플라톤과 다르다
절반의 국민이 시인이어도 좋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시 쓰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시 쓰고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시 쓰고
노점에서, 절간에서, 감옥소에서 시 쓰고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진짜 시인
알토란같은 시인을
하늘이 그렇게 많이 세상에 낼 리가 없다
(최일화·교사 시인)
+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르지마
그냥 노동자라 불러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어릴 때 공돌이가 된
노동자라 불러줘

시인은 노래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아
이야기를 할 뿐이야

가난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두 자식의 아비로서

비빌 언덕이 없고
배움이 없고
빽이 없는 노동자가

이 한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지
그저 이야기할 뿐이야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열심히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노동자라 불러줘
(정세훈·시인, 1955-)
+ 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 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나명욱의 ´6월에는´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