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0일 목요일

백년해로 서약

백년해로(百年偕老) 서약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

너무 흔해빠진 이 말

사랑을 속삭일 때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아니 정말 눈이 먼 것처럼 눈먼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너에 대한 사랑은 시작부터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계명(戒命)의 벽을 허물고 있었다
나 사랑해? 네 물을 때면

듣기 좋을 말만 골라 가득 넣어 다니는 나는

얼른 주머니를 뒤져 그때그때

네가 듣기 좋아하는 말로 내 입 주위를 바르고 있다
그럼,

내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지켜봐……
오늘은 그리워하는 사람 한 둘 두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낙오자라는 쇠도장이 천형(天刑)처럼

가슴에 찍히는 애인전성시대이다
그래 한 몸 되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 우린

너도 나도 천형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을 가장하고

마음 속에는 따로따로

그리워하는 사람을 들어앉히고 있다
이제 그리워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주인처럼 들어앉고

막상 반쪽인 우리는 서로에게

이승에서 스쳐가는 과객(過客)이 되어가고 있다

너와 나누지 못할 이야기들이 늘어날수록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감춰진 말들을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널 사랑하겠다는 말은

애당초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는 덴 백년이 걸린다는데

아직까지 백년을 같이 살았다는 말

보도 듣도 못했다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널 사랑하겠다는 말

지키지 않는 건

애당초 지키지 못할 말의 굴레에서

좀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처럼 마음 속에서 널 밀어내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수록

파뿌리 될 머리털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양 말들을 비틀다 보니

백년은커녕 아직 몇 년도 못 돼

내 속은 검게 타버렸다
그리고 혹 네가 목구멍 속으로 내 속을 들여다볼까 두려워

하나씩 나기 시작하는 흰 머리털을 감추기 위해

오늘도 검은 염색약을 덧바르고

백년이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미 마음이 떠난 넌

나를 땅에 묻고

제발 빨리 말라달라 부채질하고 있다
(후기)

이 시는 종전에 실었던 시나 분류가 안 되어 다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