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5일 수요일
정연복의 ´몸살´ 외
<몸살 시 모음> 정연복의 ´몸살´ 외
+ 몸살
딱히 찾아올 사람도 없어
이따금 외로움이 밀물지는 때
불현듯 불청객처럼
다가오는 너
끈질기게 들러붙어
몸이야 많이 괴롭더라도
너와의 꿈결 같은
몇 날의 동거(同居) 중에는
파란 가을 하늘처럼
맑아지는 정신
왜 살아가느냐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너는 말없이
화두(話頭) 하나 던지고 가지
(정연복·시인, 1957-)
+ 몸살
많은 말 중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말
내 몸이 하는 말
그 소리를 가볍게 듣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드러눕고 말았다
밤새 뼈마디 마디와 근육이 쿡쿡 쑤셔대는
심한 통증으로 끙끙 앓다가
몸살의 의미를 생각한다.
회오리 같은
한바탕 몸살이야 환영할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휴식의 시간을 통해
지쳤던 세포가 힘을 얻고
신체의 각 기관이 재정비되는 시간…….
(조금엽·방송인 시인, 1960-)
+ 몸살기·2
어딘가 아픈데
어디가 아픈 줄을 모르겠다.
서산에 해가 지듯
몸 속 깊은 곳으로 햇덩이가 떨어져
뜨거운 것이 들끓어 오르는
마흔 살의 저녁
손끝 발끝으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림,
삼킬수록 씁쓸하게 넘어오는 마른 신음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나를 자꾸 불러내는가.
뼈저린 아픔도 없이 한세월을 탕진하였노라고
사무친 눈물도 없이 사랑을 말하였노라고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참회를 해도
속은 격렬하게 끓고 바깥은 서늘하여
아직도 어디가 아픈 줄을 모르겠다.
(류정환·시인, 1965-)
+ 몸살
삶에 마른버짐이 피는 날
몸에 신열이 오른다
벌겋게 달아오른 목구멍
또는 콧구멍, 귓구멍,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혀
더 이상 나갈 구멍이 없을 때
몸 안 가득 피멍이 든다
꼿꼿한 세상에
닳아지는 살 대신 마음이 에리어
등짐으로 골병 든 아버지 등처럼
삶이 구부러져 갈 때
그 무엇도 나를 대신해 아파 주기는커녕
실실 웃으며 옆을 지나쳐 가고
나는 혼자 남아 오래오래 안을 들여다보다
벌겋게 달아오른 마음에 빨간 약을 바른다
빨간 약 하나면 다 나았던 어린 시절처럼
빨간 눈물 찔끔 흘리고 나면
생살이 돋겠지, 짓이겨진 가슴 언저리에
(강재현·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가을 몸살
초가을이 되면
감각을 잃은 빈 껍데기인 몸도 아파온다.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이
올해도 어김없는 칼부림에
계절은 나를 또 난도질한다.
그냥 지나갔으면 했는데
갱년기를 치르는 여인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에 오늘
주사 한 대 가을 바람으로 맞는다.
엉덩이 빨갛게 부어 오르고
심장은 정신없이 뛰고
금방이라도 찔러댈 듯한 송곳이
머리끝에서 치솟는다.
가을이라는 약 한 봉지
입에 탁 털어 넣는다.
다시는 몸살나지 못하도록......
(인이숙·시인)
+ 가을 몸살
벌써 며칠째인가?
이 쓰린 가슴을 쓸어내린 날이
눈이 시려 못 배길 것 같으면
낮술이라도 취해 잠들고
남 보기에
부끄럽다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리면 되지만
내 무슨 재주로
가을 하늘과 별빛을 가리고
바람을 잠재운단 말인가?
내가
별 도리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뼛속 깊이 파고들고
가슴팍이 저며오는 날에는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
이 불치병은
나,
혼자만의 병이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아!
(최홍윤·시인)
+ 몸살
쿵쿵쿵
귀에 접히는 군화소리처럼 오시는 분
자근자근 밟혀
터지는 석류의 속살 같은 분
퀘퀘한 눈빛으로 뒤척이는 이 몸에
흘러온 당신은 뉘신지요
흙빛 항아리에 갇혀
통째로 곰삭듯
욱신대는 물결을 지켜보는 나와
지켜보는 나를 지켜보는 물결의 나는
누가 진짜로 나인지요
바람의 조각칼로
내 살 속 깊이
문신을 새기고 있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나요
깊은 산 속 암자의 범종소리처럼
온몸으로
속삭이는 당신의 음성 따라
나는 뜨거운
겨울을 앓고 있어요
(김동주·시인)
+ 몸살 앓는 하늘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김지향·시인, 1938-)
+ 철쭉꽃 몸살
철쭉이 몸살을 앓는다
산허리 이리저리 헤매며 핏줄을 감아,
핏줄이 터지려 한다
발길 닿지 않는 곳,
산사로 오르는 어귀마다
눈을 찌르는 핏빛으로,
가시 찔린 손톱색으로, 보랏빛으로
햇살에 색이 바랜 분홍 저고리 등짝 같이
텁텁한 색으로. 철쭉은
핏덩이를 삼키지도 못해
떨어져나간 탑 모서리
핏줄을 삭인다
삼층 석탑 깨어진 귀퉁이의 아픔까지
묵언으로 돌고돌아
대웅전 부처의 눈 밑에 엎드린다
(이솔·시인, 1962-)
+ 비 온 뒤엔 땅도 몸살을 앓는다
비 온 뒤엔 땅도 몸이 붓는다
조금만 건드려도 껍질이 벗겨지고
헤진 상처에서 피가 난다
푸석푸석 핏기 없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무도 살짝 발꿈치를 들어올려 제 키를 키우고
땅을 배고 누워 있던 길들도 일어나 앉으려
꿈틀꿈틀 허리를 뒤튼다
살들이 불어난 저수지는
땅에게 퉁퉁 불어터지도록
젖꼭지를 물려준다
비 온 뒤엔 땅을 밟는 모든 시간도
발목이 부어있다
부운 발목을 감는 붕대처럼 바람도 조심스레
제 몸을 모두 비워 공중으로만 불어댄다
비 온 뒤엔 땅도
몸살을 앓는다
(김시탁·시인, 196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소엽의 ´오늘을 위한 기도´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