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
별달리 자랑할 것 하나 없이
드문드문 잡목 잡초나 걸치입던 들판이
정월 대보름 앞두고
색신(色身) 태워 몸치장하고 있다
가을부채(秋扇)처럼 내 팽개진 채
찢긴 청치마 사이로 싯뻘건 알몸이나 드러내다가
쥐불놀이 핑계 대고
복수의 혓날을 날름거리며 불가루 날리고 있다
이제 날 저물고 노을조차 모롱이로 숨어드는데
들불은 무어 그리 좋은지
마을 사람들 종달음 소리를
관솔 튀기며 목청껏 화답하고 있다
이런 미친 들불놀음은
어쩌면 하늘궁전까지 불태워 버릴텐데
내 몸은 어깨춤 추고 달려가고
영혼은 불꽃 세례받으랴 너울대고 있다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뻘건 불덩이 되어
덩실덩실 내가 타오르고 있다
목 타는 두 영혼이 마주치지 않고는
불꽃은 피어오르지 않는다는데
당신 떠나 보내고 펄펄 끓오르는 이 신열(身熱)은
어느 가슴과 부딪쳐 터져나는 열꽃울음인가
보라 저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상사(相思)의 혀 놀림
겉옷 덮어줄 당신 기다리며
또아리 틀며 하늘 치솟는 지귀(志鬼)의 넋 아닌가
기다리노라 기다리노라
소원성취에 탑돌이 팔만사천이라도
당신 겉옷에 붙는 불에
내 혼(魂)과 백(魄)을 불태워버린다더라도
부딪침 없는 내 영혼의 혼자 피어오름이라도
이제 들불 지고 매캐한 연기만 남았다
날이 밝으면 애꿎은 흔단만 무성히 뿌리내리고
잘하니 못하니 짐병 걸커밀고 왜장칠 텐데
몹쓸고라 몹쓸고라
달뜨는 이 가슴은 아직도 타오르고 싶으니
걸커밀 짐병도 없으니
이제 들불 지고
어둠은 펀더기 겹겹
살을 내리고 있다
이 무심으로 흐르는 시간 앞에
가시 돋는 허망한 이 밤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다시 타오르고 싶다
미처 못 다 태운 이 한(恨) 살라
그저 타오르고 싶다
풀섶 결딴나 들불 피워낼 땔거리 모자라면
이 색신(色身) 한 자락 잘라내
불사름공양 하고 싶다
그리고 혹 밤길 걷던 당신이
이 색신 불꽃으로 진데 디디지 않는다면
약간의 선행(善行)으로 기록되어도 좋다
(후기)
- 겉옷 덮어줄
설화를 약간 왜곡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지귀(志鬼)가 행차하던 여왕에게 사랑을 호소하려다 붙잡히는 것을 본 여왕이 벌을 주는 대신 ′참 고마운 일이구나′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불공 마치는 것을 기다리던 지귀가 잠이 들자 금팔찌를 가슴 위에 얼려놓고 돌아섰고, 잠이 깬 지귀는 기쁨이 불씨되어 활활 타올라 불덩이 되고 끝내 불귀신 되었다
詩의 전개상 『금팔지』 대신 『겉옷』으로 대신하였다
『서정주』는 설화를 바탕으로 『우리 데이트는』이라는 시를 썼다
햇빛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우리 데이트는 언제 이렇게 하지 ―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 상으로
나올 때 내 금팔지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놓고
그리고 그대 깨어나거든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 둘 사이에 두어야 하지
―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하지
햇빛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 흔단
서로 불화하거나 다투게 되는 실마리
재주 사투리 『흔다니』는 『남이 하는 일에 대하여 잘하니 못하니 하며 말질하는 것』
- 짐병
나쁜 짓을 하거나 억지를 부리거나 떼를 쓰는 것
- 걸커밀다
걸어잡아서 떠다 밀다
극한을 걸커미는 어머니-기적이다
기침약처럼 따끈따끈한 화로를
한아름 담아가지고 내 체온 위에 올라서면
독서는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한다
(이상, ′易斷′)
- 왜장치다
누구라고 꼭 찝어 말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속으로 삼킨 울음/ 몰래 숨긴 사랑도/
더는 못 참아 튀어나와 왜장치고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 몹쓸고
빠져 나오기 몹시 곤란하고 어려운
강씨가 아무리 눈엣가시 같으나 무엇이라 흔단을 잡아 몹쓸고로 넣을 수 없으니까 성화병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어라
(민준호, ′秋風憾樹錄′)
- 어둠살
어둠의 두께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말
마을엔 어둠살이 끼이고, 저녁床을 마주하는 시간이면
(도광의, ′저녁답이면′)
- 펀더기
넓은 들, 광야(廣野)
골골이 누벼가는 새바람 되어/
안돌이 낭길 건너 산더기를 넘고/
방황넋 헤매는 펀더기를 휩쓸며
(박용수, ′그 겨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