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7일 수요일
박희진의 ´초록 예찬´ 외
<초록에 관한 시 모음> 박희진의 ´초록 예찬´ 외
+ 초록 예찬
조물주가 지상의 태반을 초록으로 물들인 것은
너무도 잘 한 일, 너무도 잘 한 일.
만약 초록 대신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들였다면
사람은 필시 눈동자가 깨지거나 발광하고 말았으리.
(박희진·시인, 1931-)
+ 초록, 그 절묘한 색깔
이 들판과 저 산,
온갖 초목의 색깔을
초록으로 지으신
창조주께 감사한다
붉은색이 아니고
검은색이 아니고
노란색이 아니고
초록색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한다
붉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혈기를 부렸을까
검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생각조차 검었을까
노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현기증에 시달렸을까
우리 일상생활에
포근하고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초록으로 초목을 지으신
창조주의 그 은혜에 감사한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청록색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하나님은 청록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청록색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우리는 아껴야 하리.
이 세상은 유익한 빛깔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천상병·시인, 1930-1993)
+ 초록물감으로 쓴 시 - 병상의 소녀에게
5월이다 소녀야,
꿈에라도 네 창 밖을 서성거리다
슬픈 네 머리카락 보기만 보면
내가 확! 초록물감을 부어버릴 테다
네 온몸이 초록으로 물들어 버리게
네가 온통 신록으로 피어오르게
아아 이제는, 5월이다 소녀야!
(홍수희·시인)
+ 오월 예찬
넋을 앗아간
봄꽃 축제 뒤로
초록빛 물결이
성수(聖水)로 출렁인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 그 이상의 빛깔
영혼을 맑게 씻는
거룩한 성례(聖禮)
감정의 찌꺼기들과
막연한 두려움도
눈부신 싱그러움에
곱게 갈무리 된
맑은 햇살의 은총과
새들의 찬양이 있는
오월의 성스러움에
그대를 초청합니다.
(박인걸·목사 시인)
+ 초록
새봄이 왔네
새싹이 돋네
새잎이 피네
검은 고목
그 어디에
저 많은 초록 물감
숨겨 두었나
봄빛이 오니
봄바람 불어오니
스멀
스멀
초록이 선잠 깨어
기어나온다
(이문조·시인)
+ 초록의 시간
수만 개의 잎사귀 아래 누워본 적 있는가
그것도 아주아주 늙은 나무 아래
몸을 맡겨본 적이 있는가
시냇물처럼 문득 쏟아지는 저
둑을 마구 넘치는 매미소리에
꿈꾸듯 깨어본 적 있는가
하늘은 가지 끝에 걸리어
눈썹 하나까지 유쾌히 맡긴 채
시간은 얼마 동안 저 혼자였다
온통 초록빛이었다.
(강서일·시인)
+ 초록빛 휘파람
그리운 사람 그리운 날엔
초록빛 휘파람을 불자
하늘 한 모서리
지상 한 귀퉁이
해가 뜨고 지는 자리에서
원치 않는 슬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그늘지게 하여도
그리운 사람이 그리운 날엔
초록빛 휘파람을 불자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내 간절한 마음
그리운 사람에게 날아갈 수 있도록
날아가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행복의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이동식·시인, 1966-)
+ 초록 꽃나무
꽃 피던 짧은 날들은 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빛깔로
돌아와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나무는 다시 똑같은 초록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아도
꽃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된다
그렇게 함께 서서
비로소 여럿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숲을 이룬다
꽃 피던 날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도종환·시인, 1954-)
+ 초록빛에 대하여
문득 돌아보니 초록빛 숲이다.
이곳에 숲이 있다니 놀랍다.
눈 감으니 國史時間 생각이 난다.
떡갈나무, 굴피나무가 정답다.
다래덩굴 잎사귀를 먹고 자란
우리들은 초록빛이다.
진종일 고속버스를 타고
검은 열차를 타고 달려도
한 잎 풀잎을 지나치지 못해,
다시 바라보는
저 숲 속의 초록빛.
(양채영·시인)
+ 초록이 짙어지는 날에
여름산이 연둣빛 옷을 벗고
초록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느새
붉은 꽃잎 따라 봄날이 갔구나!
봄날이 갔다, 는 말처럼
외롭고 쓸쓸한 말이 또 있을까
초록이 짙어지는 오늘 같은 날엔
나무들도 제 속의 외로움 어쩔 수 없나보다
바람을 품에 안고 울먹이다 자지러지는
저 푸른 짐승!
나도 순한 짐승처럼
그 품에 안겨 한나절만 눕고 싶다
온몸에 푸른 물이 들도록
숲의 고요와 동침하고 싶다
(김경윤·시인, 1957-)
+ 구름 밑에 초록이 산다
풀밭은 각자가 힘을 모아 왕국을 세웠습니다
초록의 왕국입니다
초록의 왕국은 지배자가 없습니다
각자가 왕입니다
서로 복잡하게 얽혀도 남을 다치지 말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눈짓으로
잘 훈련된 질서가 보입니다.
누구를 떼어버리고 가는 법이 없습니다
다 함께 한 배를 타고 갑니다
어딜 가도 구름 밑입니다
주인이 있어 가꾸는 전답은 아니지만
초록의 왕국은 스스로 사는 힘을 길렀습니다
가을이면 악사들이 몰려들고
별이 빛나게 되면 음악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루가 일처리를 잘 해서
나도 서산처럼 저물 수 있습니다
구름들아, 너희들 밑에 아직은 초록이 산다
(정일남·시인, 1935-)
+ 초록 만발
마당 한 구석 빈 화분에
심지도 않은 단풍나무가
손바닥 크기로 자라고 있다
초록 만발이다
돌 바닥 포취 위에 떨어지지 않고
콘크리트 포장길 위에 떨어지지 않고
지붕 위에 떨어지지 않고
지난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큰바람에도 날려가지 않고
빈 화분에 용하게 발 내렸다
몇 만 분의 일, 복권 당첨소식이다
당신이 한번도 복권에 당첨된 적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소리다
이렇게, 현장에 있는 것 모두가 당첨 소식이다
당신도 나도
(유봉희·시인)
+ 초록빛 오후
두 팔을 뒤로 올려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지개를 편다
옆에 앉아있던 녀석도 동시에
고개를 제키며 가슴을 편다
그 녀석 콧구멍이 잘 생겼다.
난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데
그 녀석 콧구멍은 새끼손가락이 딱 맞는 것 같다.
질투.
여름 햇빛이 그 녀석 콧등 위에서 미끄러졌다.
파란 하늘
그 하늘 아래 햇빛 두 줄기
그네를 만들어 이리저리 흔들다가
뛰어내리면
꼭 그녀가 있는 곳에 떨어질 것 같은
눈부신 오후.
옆에 앉은 녀석이
한쪽 엉덩이를 들더니
방귀를 뀐다.
난 얼른 창문을 연다
창가의 파란 나뭇잎
냄새에 놀라 살짝 흔들리다가
나의 두 눈과 마주치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초록빛 오후.
(유봉길·시인)
+ 초록에게
긴 겨울 내내
칼바람의 채찍 맞으며
마치 죽은 듯
앙상했던 나뭇가지 속
그 어디 틈바구니에
너는 살아 움트고 있었나.
눈이 부시던 벚꽃
허무하게 떠난 가지마다
어느새
꽃보다 더 눈부시게 피어나
세상 풍경을 바꾸어 놓는
영롱한 연초록 불덩이.
오, 스며라
깊이 스며들어라
세상의 헛된 소란함 속으로
퇴색한 나의 정신 속으로
평화와 생명의 빛
너, 초록이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준태의 ´광주에 바치는 노래´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