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0일 토요일

황금찬의 ´보릿고개´ 외


<보릿고개에 관한 시 모음> 황금찬의 ´보릿고개´ 외

+ 보릿고개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스카라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황금찬·시인, 1918-)
+ 보릿고개

옛날 보릿고개 넘을 때
부끄러운 헛기침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굵은 눈물 한 방울 떨구던
우리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옛날 보릿고개 넘을 때
아픈 사연 숨기려고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으며
밥을 굶어도 표 내지 않으려고
이른 새벽 뿌연 연기 날리던
자존심 강한
우리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옛날 보릿고개 넘을 때
이웃집 솥뚜껑 슬쩍 밀어보고
꽁보리밥 한 냄비 몰래 넣어주며
어려움 함께 나누던
인정 넘치는
우리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굴뚝에 연기 날리지 않는 요즈음
오늘의 보릿고개 넘을 때
두 팔 걷어붙이고 사랑과 나눔으로
도시락 배달하며 자원봉사 하는
인정과 사랑 넘치는 마음으로
보릿고개 넘겨주는 웃음 가득한
우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노태웅·시인)
+ 보릿고개

보리피리 삘리릭
춤추는 소리
보릿고개 허기진 배
잠 못 이루네.

춘삼월 삘리릭
서러운 소리
뱃가죽 달라붙어
도랑물 이루네.

가려네 삘리릭
어서 가려나
보릿고개 가렴아
어서 가렴아.
(윤용기·시인, 1959-)
+ 보릿고개

봄이면 엄마 얼굴
노랗게 피는 외꽃.
보리골 푸른 바람
마음지레 설레는데
애들은 홍두깨 마냥
배를 깔고 누웠다.
(김시종·시인)
+ 보릿고개

나 어릴 적
수없이 들었던 말
보릿고개

무슨 무슨 고개
아무리 높다해도
이 보릿고개처럼
높지는 않을 거라고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랜
지긋지긋한 보릿고개
그 당시엔
이 고개를 넘지 못해
자진한 사람 소식이
심심찮게
신문 사회면을 차지하고

힘겹게 넘던
그 보릿고개 시절엔
종달새도
더욱 슬피 울었더라지?
(오정방·시인)
+ 보릿고개

나 어릴 적 어머니와
보리이삭 하나 둘 주워 모아
힘겹게 넘어온 보릿고개
그 세월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위로
햇살에 담겨 내려온다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박힌 듯
지루하기만 하던 한낮
땡볕에 타는 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주던
어머니 치마폭에 배인
그 정겹던 땀 냄새

그때 내 어머니는
그 고달프던 보릿고개를 넘어
지금은 저 세상에서
편히 쉬고 계시다
(김근이·어부 시인)
+ 보릿고개

논마지기나 밭뙈기라도 있어
밀기울 죽으로 막바지 연명했을지언정
부황으로 정신이 오락가락 해본 일 없거들랑
시를 왜곡하지 말자

저승사자마저 허기진 마른 봄 판에
어느 시인은 꽁보리밥 솥에
쌀 한줌 얹었다니
얼마나 부자였을까

그 고개는 북데기마저 비몽사몽 넘어야 했던 민둥산
모래 속에 숨어있던 띠 뿌리가 전부였을 뿐
구절초 쑥부쟁이 아카시아 꽃
신작로 질경이도 한밤중이었다

남 고생 나 몰라라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속대중만으로 만 미터쯤 될 것이라고
자신이 겪은 일처럼 슬픈 척도 하지 말자
그야말로 저승 문턱이 얼마나 화려한지 모른다면
(권오범·시인)
+ 보릿고개

김포공항 옆 가로수 아래
관상초로 누가 심어 놓았을까
누렇게 익어
수확의 시기를 넘긴 보리들이 출렁인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더니
바람 따라 흔들리며
삶이란 함께 흔들리며 사는 거라나

더러는 부러지고
더러는 쓰러졌지만
아직 낱알이 붙은 이삭틈새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던
어머니 세대의 보릿고개가
아지랑이처럼 오락가락

잘살아 보자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외치던
새마을 운동과
4H 클럽 구호는
아득한 옛날 전설이 되고
넘쳐나는 먹을거리 홍수 속에서
가물가물 아련한 필름을 푼다.
(최다원·화가 시인)
+ 보릿고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생활이 궁핍하던 시절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니 더 자세히 말해서
먹어서 해[害]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모두 먹었던 꿈같은 일들이

이제 사
모든 게 풍요로운 오늘에 와 돌이켜 보건 데
과연 얼마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래서
이겨내기 위한 싸움을 부모님 세대는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요즘 세대들은 알고 있는지.
(전병철·교사 시인)
+ 보리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
그 말을 우리는 몰라요

그냥 무럭무럭
자라기만 할 뿐

미아리고개가 한 많은 고개인 줄
그 뜻을 우리는 잘 몰라요

그냥 눈부시게
푸르기만 할 뿐
(정문규·교사 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