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7일 화요일

어쩔 때는……

어쩔 때는……


어쩔 수 없이

그저 물결처럼 흘러만 가고 싶을 때가 있다

흘러가다 고꾸라져 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출구가 막혀버린 답답증이

찌뿌드드하게 가슴에 얹혀 내리고

당신에 대한 상념은 주위를 배회하며

끊임없는 서러움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흔적이나마 움켜잡으려는 손은

언제나 빈 손 되어 되돌아서고 있다

어제 밤에도 당신은 내게 꿈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양파 껍질 같은 마음을 한 꺼풀씩 벗겨 드러내고

신석정님의 ′임께서 부르시면′이라는 시(詩)마따나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 오겠노라 새끼손을 걸었다

그러나 잠을 깨고 나면

손가락에는 당신 내음이 잔영(殘影)처럼 남아

내 향수를 자극하고

미처 다 부르지 못한 당신 이름이

사랑 여름에 들뜬 입술을 헤적이며 맴돌고 있을 뿐

당신이 앉았던 자리엔 어제 밤보다 더한 허무만 쌓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떠난 후 부친 편지들이

주소불명이라 반송되어 우편함을 그득 채우고 있다

내 마음을 실어보낼 길이란 모조리 끊겨버린 이제

당신 그리메라도 붙들려며는 그리 꿈꾸는 수밖에는 없는데도

아쉬움에 떠는 내 마음은 행여 당신 흔적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당신이 열고 들어섰던 꿈살문을 박차고 달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종달음도 잠깐일 뿐

미련은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돌아오고

당신을 만나는 기쁨에 들떠 사랑말 쏟아내던 시간과

그 시간의 침묵까지 합한 더 두꺼운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며

당신이 남긴 환영을 향해 못다한 사랑열꽃을 하소하고 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그만 잊어요′

내 가슴에 못이라도 욱질러 밖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면 좋으련만

어깃장이라도 짓는지 당신은

행인을 기다리는 나룻배가 되겠노라

날과 씨를 엮는 구름(雲)과 비(雨)의 전설을 속삭이며

가슴 열어 속살 보이고 행여 발길 돌릴세라 자락을 붙들고 있다

이런 체념과 미련의 양끝을 향해 흔들리는

내 마음을 가로지르는 줄다리기 속에서

갈피를 놓쳐버린 나는 둥둥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어디라도 닻을 내리긴 내려야 할 텐데

배 댈 어덕조차 이리 외면해버리고 풍랑을 좇아 다시 이물을 돌려세우니

그저 흘러만 가고 싶다는 내 마음이라는 것도

의지를 앗겨버린 당신의 희살거림에 지나지 않는가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이

이처럼 꿈속에서만 당신을 만날 수 있고 가두어둘 수 있다면

당신의 그 아리아리 목소리 그 소리를

이 생시(生時)에 다시 한 번 듣고

차라리 이대로 자리에서 고꾸라져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이리 옥죄는 긴장의 끈을 잘라내 버리고

그림자라도 어떠랴 당신을 껴안고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다

그래도 그래도 마음에 남아 있는 한(恨)이 으르렁거리며

원뢰(遠雷)를 불러들일 땐

이따금 먹구름 되어 당신 가슴에 주룩비 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