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5일 화요일

홍해리의 ´여자·1´ 외


<여자 시 모음> 홍해리의 ´여자·1´ 외

+ 여자·1

너는
차가우나
따스하게 어는
아이스크림,

캄캄한 희망이다.

따스하나
차가웁게 녹는
아이스크림 너는,

하이얀 절망이다.
(홍해리·시인, 1942-)
+ 여자의 무기

세상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대자연의 법칙은 무엇을 주었던가
황소에게는 뿔을 말에게는 발굽을
사자에게는 날쌘 이빨과 발톱을
토끼에게는 날쌘 동작을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내려주었지
새들은 날개를 고맙게 받았다네
그러다 보니 여자에게 줄
방어 수단이 남지 않고 말았다네
그렇다고 한 가지도 안 줄 수는 없었지
자비로운 대자연은 여자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을 주어
대담하거나 힘이 세거나 몸이 날래거나
그 어느 사내도 여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사랑을 애걸하게 만들었다네
(조프리 휘트니)
+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저 흙 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록 깃털로 눈뜨는 풀들과 새 떼들을
누가 저토록 간절히 키울 수 있을까요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나도 저 흙 속의 여자가 키우는
초록 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혹은 풀들처럼 싱싱하게 새 떼처럼 가뿐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하나쯤은 곁에 두고
볼을 부비며 살고 싶지만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문득 저 나무에도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끝없이 기도를 하는
푸른 손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정희·시인, 1947-)
+ 내가 좋아하는 여자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 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십 둘이나 된 아내와
육십 살 먹은 남편이니
거의 무능력자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이 시 쓰는 시간은
89년 오월 사일
오후 다섯 시 무렵이지만요

이, 삼일 전날 밤에는
뭉클뭉클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옆방의 아내를
고함 지르며 불렀으나
한참 불러도
아내는 쿨쿨 잠자는 모양으로
장모님의
˝시끄럽다...., 잠 좀 자자˝라는
말씀 때문에
금시 또 미꾸라지가 되는 걸
필자는 어쩌지 못했어요
(천상병·시인, 1930-1993)
+ 우리동네 구자명씨 -여성사 연구·5

맞벌이 부부 우리동네 구자명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 시중든 시간이고
그래 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고정희·시인, 1948-1991)
+ 늙은 여자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바가지
몇 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최정례·시인, 1955-)
+ 엄마의 발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 쪽으로 안 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어진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별들의 무덤과
야생조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꽃 몇 포기를
조화(弔花)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밤 꿈에도 분명 살아 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 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무희(舞姬)처럼
창공을 박차는
새의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김승희·시인, 195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상배의 ´낮술´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