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6일 일요일

강은교의 ´나무가 말하였네´ 외


<나무 시 모음> 강은교의 ´나무가 말하였네´ 외

+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강은교·시인, 1945-)
+ 나무의 철학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쉼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조병화·시인, 1921-2003)
+ 나무

목불木佛이 되어
연화좌에 모셔진 것도

장승이 되어
동구 밖을 지켜선 것도

나무입니다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책상이 되어
공부를 도와주는 것도

기둥이 되어
추녀를 떠받치는 것도

나무입니다
죽어서 큰일을 하는 나무
(김종상·시인, 1937-)
+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나무에 깃들여

나무들은
난 그대로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시인, 1939-)
+ 하늘을 만지는 나무

가지는 하늘 일이 궁금해
자꾸만 구름으로 올라가고
뿌리는 땅 일이 궁금해
자꾸만 흙 속으로 내려가고
잎들은 마을일이 궁금해
자꾸만 뒤란으로 떨어지고
꽃들은 옆집 일이 궁금해
자꾸만 담 너머로 내다보네
(이기철·시인, 1943-)
+ 의식의 나무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부러지지 않고 서서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서서
우리가 죽은 뒤에도
말없이 서서
하늘로 뻗어오르며
구름이 되고 빛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생각하는 나무여
아 부드러운 나무의 뼈.
(김규동·시인, 1925-)
+ 따뜻한 나무

벚꽃나무 속
수만 와트의 빛을 만드는
발전소

겨우 내내 비축한
빛의 양식
튀밥처럼 튀겨내어
식은 가슴마다 뿌려주는
하늘거리는 봄의 손길

성자처럼
밥 퍼주는 공양주 보살처럼
(홍일표·시인, 1958-)
+ 지옥에

지옥에 청정한
나무 한 그루만
잎새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하늘
생명의 기억,
나무처럼 잎새처럼
팔을 벌리고
창세기를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리라.
(김지하·시인, 1941-)
+ 나무의 정신

죽은 나무일지라도
천년을 사는 고사목처럼
나무는 눕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서재의 책들은
나무였을 적의 기억으로
제각기 이름 하나씩 갖고
책꽂이에 서 있다.

누렇게 변한 책 속에
압축된 누군가의 일생을
나는 좀처럼 갉아먹는다.
나무는 죽어서도
이처럼 사색을 한다.

숲이 무성한 내 서재에서는
오래 전의 바람소리, 새소리 들린다.
(강경호·시인)
+ 나무의 귀

우수, 경칩 지나면
나무가 귀를 연다
겨우내 빠알갛게 얼어붙었던 귀
쫑긋이 세워 열고 있다

온천천 둑길
늘어선 벚나무들
온천천 향해 가지 길게 뻗어
일제히 귀 기울이는 모습 볼 수 있다

산책길 노부부의 다정한 속삭임
자전거 타는 소년들의 해맑은 웃음
봄소식 재잘대는 냇물 소리
활짝 귀 열어 듣고 있는 모습 볼 수 있다

아직도 눈바람 들이치는 삼월 초순
작은 소리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으려다
당나귀 귀가 된 임금님의 귀처럼
점점 크게 열리는 나무의 귀 볼 수 있다
(정재필·시인, 1938-)
+ 나무에게

호올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은가 보다

찬바람이 따귀를 후려갈겨도
너끈히 견딜만한가 보다

남 탓하지 않고 직립한 채
세상의 이모저모 관찰하며
자신의 면적과 넓이를
한 뼘 두 뼘 측량하고 있구나

봄이면
새순과 잎 돋우고

여름이면
무성한 녹음으로 치장하고

가을이면
붉디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며

겨울이면
훌러덩 벗은 채 동안거에 들어

세상을
하나 둘 셋 넷......

무량대수*만큼 세고 있구나
(반기룡·시인)
* 무량대수: 100을 80번 곱한 수
+ 조용한 이웃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황인숙·시인, 1958-)
+ 나무를 심으며

나무는 평생을 한자리에서
철을 따라 옷을 갈아입고
보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준다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주며
짐승과 사람을 위해
과일과 열매를 맺고
피곤한 길손에게는 쉼터를 준다

나 또한 나무처럼 평생을
한 자리에 서 있었으나
내게 깃들인 것들에게
베푼 것이 없다

다만, 교훈 삼아 뜰에
나무를 가득 심었을 뿐
(도한호·시인, 1939-)
+ 나무 생각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 위에 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맞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외변산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안도현·시인, 1961-)
+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시인, 1947-)
+ 나무도 눈이 있다

나무에도 눈이 있는지
저마다 상대를 찌르지 않으려고
비켜가면서 가지를 뻗어나간다

쿵쿵거리며 내 땅이라고
내 자리라고 호통치고 찌르면
내 입에서도 비명 터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어찌 터득을 했는지

빈 공간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팔을 뻗는
다른 나무를 위한
배려와 질서가 눈부시도록 푸르다

하물며 나무도 그러하거늘
사람도 서로를 가시 돋친 말로 찌르고
행동으로 들이받는 무례함보다는

마음을 먼저 만져주고
더 많은 배려와 이해를 하면서
상대를 위해 온전히 마음을 쓴다면

눈부신 당신에게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머물 것이며
넘치고도 남을 만큼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황라현·시인)
+ 자라는 나무

실뿌리가 자라서
굵은 뿌리 되고
나무 밑동에서 조금씩
조금씩 줄기가 생겨 갈라지고
줄기에서 나뭇가지 퍼져나가
가지마다 수많은 이파리 돋아나고
마침내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 보아라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하여 나무는 위로
위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위로
아래로 힘껏 온몸을 뻗으며
실처럼 가늘어지는 나뭇가지들
그 무수한 가지 끝마다
햇볕이 쌓이고
빗방울이 머물고
바람이 걸려 조금씩
조금씩 줄기를 기르고
밑동을 굵게 살찌우고
마침내 땅속으로 들어가
엄청나게 많은 뿌리로 갈라지며
넓고 깊게 퍼져나간다 보아라
하늘로부터 땅을 향하여 나무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것이다
(김광규·시인, 1941-)
+ 나무의 신년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한평생을 지내는 듯한
나의 태평스런 모습

그래요, 나는 뭔가를 이루려고
안달하지는 않습니다.

햇살과 별빛과 달빛
비와 이슬과 서리
바람과 새와 벌레들....

나의 몸에 와 닿는 어느 것이라도
묵묵히 받아들일 따름이지요.

무심(無心)!

이 보이지 않는 힘 하나에 기대어
나는 어제도 오늘도 말없이 살아갑니다.

마치 죽은 듯이
속살 깊이

세월의 주름살 같은
나이테 하나씩 지으며

나는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정연복·시인, 1957-))
+ 聖 느티나무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 그루 榕樹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하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나희덕·시인, 1966-)
+ 쓰러진 나무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나희덕·시인, 1966-)
+ 팽나무가 쓰러, 지셨다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이재무·시인, 1958-)
+ 나무처럼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닌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법정·스님, 1932-201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배한봉의 ´과수원 시집´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