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맹문재의 ´물고기에게 배운다´ 외


<길을 노래하는 시 모음> 맹문재의 ´물고기에게 배운다´ 외

+ 물고기에게 배운다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맹문재·시인, 1965-)
+ 구름과 바람의 길

실수는 삶을 쓸쓸하게 한다.
실패는 생(生) 전부를 외롭게 한다.
구름은 늘 실수하고
바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구름과 바람의 길을 걷는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구름은 항상 쓸쓸히 아름답고
바람은 온 밤을 갈대와 울며 지샌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길
구름과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도종환·시인, 1954-)
+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신경림·시인, 1936-)
+ 굽이 돌아가는 길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진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박노해·시인, 1958-)
+ 세상의 길가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나희덕·시인, 1966-)
+ 길은 그렇게

두엄내 풍겨오는 들판을 지나
놀빛 고운 산마루를 기어 넘고
울멍줄멍 구름골짜기를 감돌아
길은 저 혼자서 가고 있었다.

물비린내 풍기는 갯벌을 따라
끝없이 설레는 물이랑을 누벼서
마파람 몰아오는 수평선 너머로
길은 쉬지 않고 가고 있었다.
애달픔처럼 먼 바다를 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나는
길을 따라, 길과 더불어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항상 함께 다니는 나의 길.
(김종상·시인, 1937-)
+ 눈을 감고 보는 길

애벌레의 소망은 자신이 안주할 고치가 아니라 그곳으로부터의 탈출,
곧 나비가 되는 데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서
마침내 가두고 말 성을 쌓고 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때가 많습니다.
애욕의 성. 소유의 성.
(정채봉·동화작가, 1946-2001)
+ 길

종일 사람과 차가 복작대는 원종동 사거리.
허리가 기역자로 꺾인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간다.
이밥은 꿈에도 어려워 굶지나 않으면 꿈이 달았던 어린 시절.
언감생심 당신은 타볼 꿈도 꾸지 못했던 유모차엔
막막한 시간의 갈피인 양 얼기설기 폐지들이 쌓여 있다.
폐지의 두께만큼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폐지의 무게만큼 돈을 달아 주는 것도 아니어서
흔들리는 눈금 따라 흔들리는 마음으로 받아드는 푼돈엔
새벽부터 견딘 땀과 허기가 담길 리 없는데
지글지글 불볕 더위 속 모음을 잃은 자음처럼 가는 길
지워지다 겨우 남은 손금처럼.
(한희철·목사 시인)
+ 길

일천구백구십삼년 삼월 초하룻날
시인이란 딱지를 붙인 덕에
이십여 년 몸담고 마음 주었던
공장 생활을 떠나
나 기독선교신문사라 하는
주간지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네

자식들은 아비가 더 이상
밤샘하는 공돌이가 아니라며
초저녁별처럼 떠들어대고
아내는 건강을 되찾을 거라며
노정勞程의 베갯머리에서
늦가을 박처럼 밤잠을 설쳐댔지만

실금실금 목젖 같은 눈물이 나왔네
노독에 찌들어
철 바뀌는 오뉴월
냉기 없는 끝바람에도
실없이 몸살을 앓아대는 내 몸뚱이
왠지 전장의 패배자 같은 생각이 들어

이제는 이게 내 삶이다
취재 노트 펼쳐 들고
단 한번의 부흥집회로
몇 백만 원의 돈을 챙긴다는
돈 많은 부흥목사들을 만나보고

습기 찬 냉 바닥 지하실에서
몇 푼 안 되는 사재를 털어
더 못한 이들께
자선을 베풀고 있는
돈 없는 성직자들도 만나 보았네

오늘은 일천구백구십삼년 십일월 초하룻날
시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기자가 된지
여덟 달만에 사표를 썼네
인터뷰 취재를 하러 가기 전
점심을 사 주어야 하는
돈 없는 사람들보다,
점심을 사 주고
교통비도 넣어주는
돈 많은 이들 앞으로 나 있는 길
자꾸만 그 길로 향하려는
내 가난한 발길

다독이며, 사표를 썼네
(정세훈·시인, 1955-)
+ 삶에게 길을 묻다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천양희·시인, 1942-)
+ 하루로 가는 길

하루로 가는 길은
하루를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스물네 시간을 살아야 했다
1분만 안 살아도 끝장나는 인생,
하루로 가는 길은
낮과 밤을 지나야 하는 법,
어제와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소음을 거쳐야 했다
메마른 밤, 오늘의 갈증이
내일 해소된다고 믿으면서
참아낸 하루, 하지만 물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는 낙타처럼
오늘의 짐을 또 내일 짊어져야 한다
발걸음은 계속되다 하루로 가는 길에서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
하루에 완성되는 인생도 없지만
아무튼 죽음이 모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무덤 위로 뜨는 해를 보며
오늘은 숨 크게 밝은 하루를 누려야 한다
(최승호·시인, 1954-)
+ 길 위에 서다

세상의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는 모양이다

사랑은 미움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한 줌의 흙이 되어
새 생명의 분신(分身)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가만히 머무르지 말라고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생은
이미 생이 아니라고

작은 몸뚱이로
혼신의 날갯짓을 하여

허공을 가르며 나는
저 가벼운 새들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현종의 ´아침´ 외 "> 김종익의 ´병원 입원실에서´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