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7일 월요일

공광규의 ´거짓말´ 외


<삶의 반성 시 모음> 공광규의 ´거짓말´ 외

+ 거짓말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공광규·시인, 1960-)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오규원·시인, 1941-2007)
+ 유리(琉璃)의 길·3

개미를 보면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비를 보면 나는
너무 많은 악에 길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잔디를 보면 냉이꽃을 보면 나는
너무 많은 봄을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생이 둥굴레풀 꽃다지 민들레
고사리 우엉잎 도꼬마리 이질풀
아, 나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놓쳐버렸다

구름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을 보면 파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출렁거릴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기철·시인, 1943-)
+ 비망록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문정희·시인, 1947-)
+ 왼손과 오른손의 거리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새해 새아침 다짐을 했다

전철에서
껌 한 통을 내미는 노인의 손을 외면했다

해 저무는 거리에서
구세군의 종소리와 자선냄비를 비껴갔다

우편함에 배달된
적십자회비, 유니세프 편지는
뜯지 않고 휴지통에 던졌다

식당에서는 구두끈을 고쳐 매고
계산대를 비켜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나 전철에서
휠체어보다 앞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교회에서
천 원짜리 몇 장 꼬깃꼬깃 손에 쥐고
옆 사람 눈치를 살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을 달달 외우며
주일예배도 빠지지 않았다

오늘도 하루를 오독(誤讀)하며 보냈다
왼손과 오른손의 거리가 너무 멀다
(곽문연·시인, 충북 영동 출생)
+ 아, 이 열쇠들

사람을 정리하다 보니
짝 안 맞는 열쇠와 자물쇠들 수두룩하다
감출 것도, 지킬 것도 없으면서
이 많은 열쇠와 자물쇠들
언제 이렇게 긁어모았는지

아, 이 열쇠들
아. 이 자물쇠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내 앞에 오래 서성이던 그 사람
이유 없이 등돌린 건
굳게 문 걸어 잠그고 있던 내 몸의
이 자물쇠들 때문이었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열려있던 그 집
그냥 들어가도 되는 그 집
발만 동동 구르다 영영 들어가지 못한 건
비틀며, 꽂아보며
열린 문 의심하던 내 마음의
이 열쇠들 때문이었다
(문창갑·시인, 1956-)
+ 잊고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세끼 밥이면
충분하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사랑하고 사는 일은
하나의 가득 찬 사랑이면
충분하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하루 너 댓 끼니 먹기라도 할 듯이
서너 푼 사랑이라도 나누고 살 듯이
기고만장한 욕심을 추켜세워도
누구나 공평히
세끼 밥을 먹고
하나의 사랑을 묻는 것만으로
충분해야 한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강재현·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흐린 날은

멀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의 허기 때문에
몰랐던 안경알에 묻은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행복한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지나친 확신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도
(장옥관·시인, 1955-)
+ 新綠을 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박재삼·시인, 1933-1997)
+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선인장 하나가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왜일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도대체 왜?
사람의 곁에서 훌쩍 떠나버린 것일까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지른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걸까
며칠 째 답답한 가슴만 움켜잡고 있다
아프면 병원으로 가듯 꽃집을 찾아갔다
˝햇볕과 놀게 하셨나요? 물은 주셨습니까?˝
이제 알았다, 나의 무식함 때문임을
나는, 나도 모르게 가해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나에게로 온 이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
선인장에게 물은 주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꿋꿋하게 나만 지금껏 잘 살아온 것이다
아아, 이를 어쩌나!
그래, 또 누군가에게 잘못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가시 없는 말이 그대에게는 비수일 수도 있었겠지
아아, 참 미안하다 그대여!
한동안 선인장 앞에서 성호를 긋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눈을 감아본다
(정이랑·시인, 1969-)
+ 미안하다

꽃들아, 미안하다
붉고 노란색이 사람의 눈을 위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고마워한 일

나뭇잎들, 풀잎들아 미안하다
푸른 빛이 사람들을 위안하려는 거라고
내 마음대로 놀라워한 일

꿀벌들아, 미안하다
애써 모은 꿀들이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기특해 한 일

뱀 바퀴 풀쐐기 모기 빈대들아 미안하다
단지 사람을 괴롭히려고 사는 못된 것들이라고
건방지게 미워한 일

사람들아, 미안하다
먹이를 두고 잠시 서로 눈을 부라린 이유로
너희를 적이라고 생각한 일,
내게 한순간 꾸며 보인 고운 몸짓과 단 말에 묶여
너희를 함부로 사랑하고 존경한 일,

다 미안하다
혼자 잘난 척, 사람이 아닌 척하며
거추장스럽다고 구박해 온 내 욕망에게도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남을 위해,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바로 제 몸과 마음 때문에
또는 제 새끼들 때문에 살고 있음을 이제서야 알아서
정말 미안하다
(이희중·시인, 1960-)
+ 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법정·스님, 1932-201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최명란의 ´사진을 보며´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