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이상교의 ´겨울 들판´ 외
<겨울 시 모음> 이상교의 ´겨울 들판´ 외
+ 겨울 들판
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
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 벙어리장갑
나란히 어깨를 기댄 네 손가락이 말했지.
˝우린 함께 있어서 따뜻하단다.
너도 이리로 오렴!˝
따로 오뚝 선 엄지손가락이 대답했지.
˝혼자 있어도 난 외롭지 않아
내 자리를 꼭 지켜야 하는걸.˝
(신형건·아동문학가, 1965-)
+ 다시 겨울 아침에
다시 겨울 아침에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겨울 고해
겨울밤엔
하늘도 빙판길입니다
내 마음 외로울 때마다
하나 둘 쏘아 올렸던
작은 기도 점점이
차가운 하늘밭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잠들었던
내 무딘 영혼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아프게 박혀옵니다
사랑이 되지 못한
바램 같은 것
실천이 되지 못한
독백 같은 것
더러는 아아,
별이 되지 못한
희망 같은 것
다시 돌아다보면
너를 위한 기도마저도
나를 위한 안위의
기도였다는 그것
온 세상이 꽁꽁 얼어
눈빛이 맑아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겨울은,
나에게도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합니다
(홍수희·시인)
+ 겨울 산
맨발로 선
나무들이
껄껄 웃고 있다.
근엄하게
내려오는 눈송이,
경직된 뿌리 끝에서
경제정책(經濟政策)이
아릿아릿 시린데.
겨울 산에서
헐벗은 나무들이
실실 웃고있다.
허허허
허 허 허.
(양수창·목사 시인)
+ 그대, 겨울 없는
누가 하늘 항아리를 뒤집어놓은 걸까
함박눈이 전봇대 무릎까지 잡아먹었다
자동차는 제자리에서 엉덩이를 깐 채
벌써 몇 시간째 붕붕붕, 방귀를 뀌어댄다
사람의 발자국은 서서히
지구 어느 모퉁이의 추억으로 사라지고
거리에는 아이의 웃음소리만이 총총총 뛰어다닌다
오도카니 창가에 앉아
나는 한가로이 감자를 까먹는다
살아왔던 날들이 팍팍했던 걸까
문득, 설탕이 그리워진다
난 창 밖으로 감자를 길게 뻗어 설탕을 찍어 먹는다
겨울이 맛있다 세상이 달콤해진다
늘 그렇듯
삶이란 뒤집어지기 마련
어느새 달콤함은 쓸쓸함이 되고
겨울밤은 우물처럼 깊어진다
나는 또 이 밤을 어찌해야 하는가
창 밖에는 달님만 외롭게 걸려 있다
(김현태·시인, 1972-)
+ 겨울 나기
겨울은 껍질이 두꺼운 계수나무다
어린 나무가 겨울 앞에 꿋꿋할 수 있는 건
바람 맞을 잎이 없음이다
뿌리깊은 리듬으로 오는 설레임이 있음이다
매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껍질 속에 저장하였다가
사월 다스운 봄 햇살에 발효시켜
박하나무는 박하 잎을
계수나무는 계피를 만드는 것이리라
한둥치 겨울옷을 벗을 때마다
고갱이는 굵어지고
껍질은 단단해진다
어린 나무가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는 건
골패인 낙숫물 소문을 듣기 위함이다
껍질 속 비밀스런 세포분열에
향기 짙은 녹수의 싹 힘껏 밀어올릴
물 오른 봄기운을 기다림이다
(탁명주·시인, 서울 출생)
+ 겨울 농부
우리들의 가을은
귀퉁이에
검불더미만을 남겨놓고
저녁 하늘에 빈
달무리만을 띄워놓고
우리들 곁을
떠나갔습니다
보리밭에 보리씨를 뿌려놓고
마늘밭에 마늘쪽을 심어놓고
이제 이 나라에는
외롭고 긴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헛간의 콩깍지며
사래기를 되새김질하는 염소와
눈을 집어먹고
껍질 없는 알을 낳는 암탉과
어른들 몰래 꿩약을 놓는
아이들의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그리하여
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눈 속에 갇혀 외롭게
우는 산새 소리를 들을 것이며
눈에 덮여서 더욱 싱싱하게
자라나는 보리밭의 보리싹들을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나태주·시인, 1945-)
+ 겨울 한나절
눈 올듯 말듯
햇빛 날듯 말듯
포장마차집에서 막소주 한잔, 꽃가게 가서 실없는
농담, 시계방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돌아와서 눈물 찔끔,
그리고 다시 또 소주 한잔,
행여 동백꽃 실려올까,
불현듯 달려가본 간이역 플랫폼.
남녘에서 오는 열차는 멎지 않고
오늘도 벌써 해 저무는데,
우체부 올 시간은 지났고
아직도 누군가
올듯 말듯.
(오세영·시인, 1942-)
+ 겨울 풍경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는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 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 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 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박남준·시인, 1957-)
+ 송사리들의 겨울
아침마다 뒷산을 오른다
개울물이 추위에 점점 가늘어지더니 꼬리를 잘려버렸다
며칠 전부터 산이 웅덩이를 어항처럼 안고 서 있다
산은 수입원 모두 끊겨버린 가장 같고
송사리들은 햇살을 빨아먹으려고 파닥거린다
웅덩이 가장자리에 가시처럼 얼음이 돋아난다
다급해진 산이 밤마다 살림살이를 내다 팔아버린 듯
웅덩이의 얼굴이 더 작아져 있고 핼쑥해져 있다
송사리들은 마당도 잃고 마루도 잃고 시무룩하니 오글오글하다
다음날 두근두근 계곡을 오르는데 웅덩이가 사라져버렸다
아, 산이 최후의 결심을 해버린 듯 얼음장을 끌어다가
꿈도 얼어버릴 동면 속으로 송사리들을 밀어 넣어버렸구나
낙엽들 모아 한 겹 덮어준다
봄까지는 아직 두 고개는 더 넘어야 한다
(문정·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