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8일 금요일

제제.2[김미선]


이제는 구태여
우리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아니 그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사랑은 때때로
무한한 동경이지만
사랑은 때때로
무한한 실망과 좌절로
힘없는 나를
자꾸만 무너지게 하므로
사랑보다는 차라리
단순한 추억으로
당신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구실로
사랑보다 더 커다란 것을 나는
읽고, 버리고
그리곤 후회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사랑한다는 말은 않기로 합시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긴
당신은 한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준 기억이 없습니다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쁜 종이를 보면
당신의 이름이 쓰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생각날 때마다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편지를 쓰기 위하여
그 종이를 펴 놓으면 또
늘 같은 얘기
같은 물음
같은 대답으로
시작과 끝이 또 같아집니다.
한번 견뎌볼까 마음먹고
그 길다랗게 쓴 내 마음의 것들을
모두 지워도 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여러번의 행위에도
어찌 하얗게 지워지지가 않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앉았으려면
거울에 비춰지는 내 얼굴에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그늘만이 보입니다
그리움을 단지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가슴으로만
간직하지 못하고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제발 도와달라는 듯이
하소연하고 말았으니....
결국은 내게로 돌아와
피부 깊숙히
그리고
가슴을 온통 채우고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할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아 나는
그리움 하나도
비밀스럽게 간직하지 못하는
그런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움이
비밀스레 존재할 땐 그래도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행복하기도 했건만
이제 남은 것도 없고
그보다
나 혼자만의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속이 상하고
이렇게 빈껍질뿐인
하나의 모습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의 허상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울 속엔
당신의 얼굴이 비춰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