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정현종의 ´부엌을 기리는 노래´ 외


<부엌에 관한 시 모음> 정현종의 ´부엌을 기리는 노래´ 외

+ 부엌을 기리는 노래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이타(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성단(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 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요.
(정현종·시인, 1939-)
+ 부엌 칸타타

저녁을 짓는다
부엌은 나의 제단
일상은 나의 거룩한 구유
나는 부엌의 사제
망사커튼 드리운 서향 창
저녁놀 아래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마련한다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 합창
압력솥의 볼레로
냄비와 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
접시와 사발들의 마주르카
영대 대신 앞치마를 두른
나는 부엌의 제사장
부엌은 성스러운 나의 제단
쉭쉭대는 수증기 설설 끓는 국과 찌개들의 파르티타
당신은 즐겨 흠향하신다
삶의 싱싱한 비린내와 비루함의 비밀스런 비빔밥
수다스런 푸성귀들의 아삭거리는 음표들
당신이 가장 오래 음미하는 애끓는 간장
말없는 섬유질의 혀
오늘도 나는 저녁을 짓는다
부엌, 아득할 것도 없는 나의 지평선
맵고 쓰고 짜고 시큼한
넘실거리는 한 잔, 나를 곁들여
참 까탈스런 미식가 당신에게 바친다
공손한 듯 삐딱하게
그래도 두근거리며
(박은율·시인, 1952년 전남 목포 출생)
+ 여자가 부엌에 있을 때

여자가 부엌에 있을 때
식구들은 모두 배가 고픈가 보다.
여자가 부엌에 있을 때
식구들은 비로소 안심인가 보다.
있을 자리에 있구나 생각하는가 보다.
그녀가 부엌에서 무얼 하는지
아무도 확실히는 모르나 보다.
독한 파 마늘을 다지고
매운 고추를 으깨어
날선 칼을 들어 질긴 힘줄을 난도질할 때,
만사가 두붓모처럼 연하게 되어
다만 여자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다른 식구들은 꿈에도 모르나 보다.
냄비 바닥 눌러서 불길을 잠재우고
젓가락 휘저어 세계의 옆구리를 가르는 것을
여자에게 복종하는 순한 세상을
모르겠지,
꿈에도 짐작할 수 없겠지.
다만 여자가 부엌에 있을 때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정말로 행복한가
그렇다면 됐다.
여자 역시 행복하다.
(이향아·시인, 1938-)
+ 작은 부엌 노래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 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문정희·시인, 1947-)
+ 부엌 구멍

아랫목 두툼한 토담벽
가운데 구멍 하나 뚫어 놓고
맑은 유리 구해다 밖으로 대고
할머니는 닥나무 종이로
가장자리 풀 발라 붙여 놓고

그 구멍 지름은 20센티 안팎
나는 아침마다 무릎 세워
그 구멍 지켜봤지요.

요지경 속의 요리사는 우리 엄마
가지나물, 호박잎, 된장찌개, 보리밥,
달걀 같은 감자 한 대접, 짐이 모락모락!!

석양에 해떨어지면
부엌 구멍에 불 밝혀 놓고
요지경 속 우리 엄마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질 않네.
(이월순·시인, 1937-)
+ 어머니의 부엌

나 시집 올 때만 해도
어머니의 부엌은
반짝반짝 잘 닦여진 집기들이
며느리가 발돋움을 해야만 닿을
높은음자리에 있었다
며느리와 친숙해질 무렵
편안한 자세로
음 자리가 조금씩 낮아지더니
키 작은 며느리가
편안한 자리에 올려둔 그릇도
굽은 등의 어머니에겐
높은음자리였던지
직립의 개수대를 외면하고
내동댕이치듯 자꾸만 바닥으로 내려앉아
욕실의 고무 대야와 마주앉은
접힌 수건이 올려진 낮은 플라스틱 의자가
어머니와 어울리는 편안한 풍경이 되었다
(안숙자·시인)
+ 입식 부엌

반지르르한 가마솥에
노르스름한 누룽지
뜨물 붓고 나무 주걱으로 뭉그적거리다
또 한소끔 불을 밀어 넣으면

때때로 구들목 막혀, 아궁이로 내미는 붉은 불의 혓바닥이 얼굴을 핥는 세월을 밟고, 연기 한 오라기 없는 오늘의 입식부엌, 감미로운 멜로디 한 소절 들려주며 고슬고슬 밥이 되는 전기 압력밥솥, 문명의 소리 당당하기는 해도

매운 연기에 눈시울 붉히며
때를 챙기며
속적삼 적시던 어머니
그날의 달디단 땀방울
문득 그립다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부엌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詩 같고.(오 詩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오 詩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詩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 데 보는 詩集 같고.
(장석남·시인, 196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종익의 ´잡초´ 외 "> 허수경의 ´聖 숲´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