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유응교의 ´엄마의 건망증´ 외


<건망증 시 모음> 유응교의 ´엄마의 건망증´ 외

+ 엄마의 건망증

엄마가
외출할 때면
현관문이 불이 난다.

핸드폰 가지러
지갑 가지러
핸드백 가지러

몇 번씩 들어왔다 나가며
하는 말
´이이고 내 정신 좀 봐´

갑자기
냉장고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가끔씩
가스레인지 위엔 연기가 가득 찬다.
(유응교·건축가 시인, 전남 구례 출생)
+ 건망증에 좋은 약은

속앓이에 설사약을 찾던 날
화장실에선 기억나지 말아야할 술집 외상값이 떠오른다
씁쓸한 기분에 설사약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 한 개비 베어 문다
건망증엔 특효약이 없다
(지철승·시인)
+ 건망증

잊자 잊어버리자
하면 할수록 뚜렷한
한 줌의 기억

이것은 이것만은 알아야지
가슴속 깊이 새기면
어느덧 물 위에 쓴 글같이
지워지는 허무

물어도 알 수 없는데
좁은 골방 가득 떠도는 망상

급하고 급한데
기억 없는 내 집 전화번호는
빙빙 머릿속만 헤집고 다닌다.
(노태웅·시인)
+ 건망증

잊을 것은
열쇠나 거스름돈이 아니다
약속시간도 원고도 아니다

나이를 잊어라
종교를 잊어라
집을 잊어라
직업을 잊어라

아아 까맣게 잊고 싶은
내 모오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거리를 헤맨다

잊기 위하여
꿈꾸는 죄
잊기 위하여
기울이는 잔

잊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도
만드는 웃음마저도
깜박깜박 잊어라
새하야니 지워라.
(유안진·시인, 1941-)
+ 건망증

빨간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췄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
무슨 볼일로 누구를 만나러 가고 있는지
내가 멈춰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를
잊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멍한 정신으로
길을 따라 가다가 문득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에 적힌 글자들이
우르르 떨어져 날아와
사정없이 내 머리를 내려치며
내가 가는 곳을 일러준다

건망증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급히 주차장에다
차를 버리고
빨려들 듯 건물 안으로 뛰어든다
건망증이 오기 전에

내 아내는 지금
병원 입원실에 누워있다
(김근이·어부 시인)
+ 건망증

출입문을 잠그고 나서
뒷문도 잠갔는지 확인하러
다시 들어가시는 어머니
그때 치렁치렁 검은 머리이던 내가

이제 쥐정신이다
가스 불에 찻물을 올려놓고
창 바깥
마로니에 잎들의 잔잔한 춤에 홀려

탄내가 솔솔, 칙칙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안절부절못하는
주전자 속 옥수수처럼
내 생각도 재가 된 지 오랜 모양이다

그날 종일 나뭇잎도 안타까웠는지
일렁일렁 쉴새없이
주름살을 지었다가 폈다가
내 안에 타버린 냄새 지우려
바람을 일으켰다 재웠다가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건망증

40대 때엔
전년前年에 일어난 일도
어렴풋이 기억되더니

50대 때엔
전월前月에 일어난 일도
하나같이 기억이 희미했다

60대 때엔
전주前週에 했던 일도
까마득하여 기억을 더듬는데

70대가 되면
어저께 무엇하며 보냈는지
조목조목 기억이나 할까?

아, 그렇구나
망각하면서 살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건망증 혹은 기억 상실증·2

세상에 잊어선 안 될
일이란 없다

신문 보지 않듯
세상 보지 않기

밥그릇 씻듯
머리 속 비우기

오늘 아침 일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 내게 싫은 소리를 하여
잠시 짜증이 났지만
물 좀 마시고
전화 받고
그러는 사이에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누구더라 어떻게 했더라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잊어버렸다

사랑을 잊는 건,
… 글쎄?

분노를 삼킨다는 건,
… 글쎄

그러나, 세상 너머
세상이 있는 것 기억하며

아파트 너머
저녁 노을이 있는 것 기억하며

한강의 바람과
바람에 휘둘리는
버드나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내게 소중한 것은
지금 눈에 차오는
한바탕의 가을 풍경임을
깨닫게 된다
(최상호·시인, 경북 경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함기석의 ´너의 작은 숨소리가´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