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천양희 시인의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외


<성자에 관한 시 모음>

천양희 시인의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외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시인, 1942-)
+ 몸만 가지고 말한다면야

몸만 가지고 말한다면야
성인(聖人)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갈 때까지
핏줄이 제 길을 벗어난 적 있으며
허파가 제 일을 마다한 적 있느냐?
몸만 가지고 말한다면야
공자(孔子)와 도척(盜拓)이 다르겠느냐?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갈 때까지
하늘님 계시는 유일한 곳
지금 여기를 떠난 적이 있느냐?
자기 몸처럼만 살았다면야
성인(聖人)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현주·목사)
+ 비누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聖者)
친수성(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 주었다
밖에서 묻혀 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었다

그는 성직(聖職)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 온 약점 말없이 닦아 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소모(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생(生)을 마치는
이 시대 희한한 성자

나는 오늘
그에게 안수(按水)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임영조·시인, 1943-)
+ 성자(聖者)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넣는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 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김기택·시인, 1957-)
+ 오래된 나무

소나무들이
성자처럼 서 있다
어떤 것들은
생각하는 것같이
턱을 괴고 있다

몸 속에 숨긴
얼음 세포들

나무는 대체로 정신적이다
고고(高高)하고 고고(固固)한 것 아버지가 저랬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는 모두 무우수(無優樹)같다

아버지는 가고
나는 벌써
귀가 순해졌다

바람 몰아쳐도
크게 흔들리지 않겠다
(천양희·시인, 1942-)
+ 걸레가 사람에게

제 몸
닳고 헤져도
누군가 깨끗해질 수 있다면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외진 구석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 몸 축축이 젖어
누군가 빛날 수만 있다면
온몸 비틀리는 아픔쯤은
언제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고광근·아동문학가, 1963-)
+ 낙엽

도봉산 비스듬히
다락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

서로를 보듬어 품은 채로
나란히 누운 낙엽들

뭇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푸르고 붉던 시절이야

한 점
아쉬움 없이 작별하고

초겨울 고운
연분홍 햇살 아래

저렇게 고요히
대지의 품에 안긴

너희들은
영락없는 성자(聖者)들이다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