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정일근의 ´가을의 일´ 외
<가을을 사색하는 시 모음> 정일근의 ´가을의 일´ 외
+ 가을의 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詩)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니
시(詩)를 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정일근·시인, 1958-)
+ 열매 몇 개
지난 여름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고은·시인, 1933-)
+ 가을 노래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가을은 눈의 계절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도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멀리 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김현승·시인, 1913-1975)
+ 슬픈 가을
쨍그렁 깨질 듯한 이 가을 하늘
눈물겹다
무거움의 존재로 땅 끝에 발붙인 짐승
부끄럽다
멀리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가을 잠자리들 원 그리며 무리 짓는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이 가을 햇살 아래
아, 아프구나! 가볍지 못한 존재의 무게가
제 무게 이기지 못하여 모두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에
나는
무엇이 이토록 무겁게 허리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이영춘·교사 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가을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시간을 가을 쪽으로
애써 끌어당긴다
밤을 지새운다
더듬이가 가을에 바싹 닿아 있다
만져보면 탱탱하다 팽팽한 줄이다
이슬이 맺혀 있다
풀벌레들은 제가 가을을 이리로 데려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풀벌레 울음소리들은 들숨과 날숨의 소리다
날숨은 소리를 만들고 들숨은 침묵을 만든다
맨 앞쪽의 분명함으로부터 맨 뒷쪽의 아득함까지
잦아드는 소리의 바다,
그 다음 침묵의 적요를 더 잘 견딘다
짧게 자주자주 소리내는 귀뚜라미도
침묵이 더 길다
다른 귀뚜라미들이 서로 침묵을 채워주고 있다
열린 온몸을 드나들되 제 몸에 저를 가득 가두어
소리를 만든다
나는 이 숨가쁜 들숨을 사랑하게 되었다
(정진규·시인, 1939-)
+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황토흙 얼굴의 농부들이
아픈 소는 다 나았느냐고
소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낯모르는 내 손에
고향 불빛 같은 감을
쥐어주기도 한다.
콩과 팥과 고구마를 담은 보따리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껴안고 가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귀에 정겹다.
창문 밖에는
꿈 많은 소년처럼 물구나무선
은행나무가 보이고,
지붕 위 호박덩이 같은 가을 해가 보인다.
어머니가 싸주는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 버스.
사람이 못내 그리울 때면
문득 낯선 길가에 서서
버스를 탄다.
하늘과 바람과 낮달을 머리에 이고
(이준관·시인, 1949-)
+ 가을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 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아,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돌아갈 뿐이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가을이라는 물질
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
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이기철·시인, 194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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