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화엄의 늪

지리산 남쪽 기슭의
천 년 고찰 찾아가는 길이
입춘 맞아 질퍽거린다
일주문 지나면서 발목을
금강문 지나면서 허리를
천왕문 지나서 어깨까지 뺏겼다
보제루에 턱 하고 다달으니
목까지, 입까지, 귀까지
화엄의 늪에 빠졌다
마침내 두 눈만 살아 남아서
빗살무늬 살문을 열어젖히는데
각황전 천장 깊이 파놓은 우물에서
화엄의 햇살이 쏟아진다
창 바깥에는 또
눈속 동백꽃이 화엄으로 피었다
몸 잃고 바라본 세상에
아득하게 눈 멀었는지
해 떨어지고 어두컴컴하다
길 비추는 둥근 달이
또 화엄의 늪으로 가는 것 아닌가
이제 그만 됐다고 달빛 좇아가며
저 아래에 놓인 나를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하면서
냅다 달려 내려가는데
아차차, 대웅전 늪에
화엄의 머릿속 한 터럭
병을 숨겨두고 온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