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7일 목요일

천상병의 ´한가위 날이 온다´ 외


<한가위 시 모음> 천상병의 ´한가위 날이 온다´ 외

+ 한가위 날이 온다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하시겠지요.
(천상병·시인, 1930-1993)
+ 달빛 기도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며 생각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들.

한라산 기슭에도
태백산 골짜기 두메 산골에도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이마
달빛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를 생각할까.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내게로
따뜻한 마음의 손을 내밀까.

그야 모르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모든 어린이들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언제 만날지
어떻게 사귀게 될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는 따뜻한 마음의 손을
서로 잡고 있는 것 같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어화둥둥 좋구나, 한가위가 좋구나

여기 저기서 모인 식구들
만면에 웃음 가득
호호~하하 즐겁구나

오랜만에 만난 혈육 어디보자
고운 얼굴 자식사랑, 손주사랑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내 강아지들

이렇게도 좋을 수가
이렇게도 기쁠 수가
어화둥둥 좋구나, 한가위가 좋구나

선물꾸러미 내려놓고
연만하신 부모님께 허리 굽혀 절 드리니
귀하디 귀한 내 새끼들
주름진 얼굴에 보름달이 두둥실

칼쿠리 손으로 만지셔도
그 사랑 찌릿찌릿 가슴이 뭉클
맞잡아 보는 섬섬옥수
비단 손결이 떨리누나

팔월이라 한가위 만나니까 반갑구나
마음도 넉넉 음식도 넉넉
웃음소리 요란하고 집안이 들썩들썩
한가위라, 명절이라 우리모두 좋구나
(권정아·시인)
+ 한가위

파릇하던 벼이삭도 어느새
누렇게 잘 익은 알곡으로 고개 숙인 아침
이슬 머금은 들녘의 고향 주렁주렁
달린 무게를 못 이겨 축 늘어진 뒤뜰의
노릇노릇 익어가는 감나무 사이로
방긋이 고개 내민 한가위 아침

이른 봄 취했던 쑥 넣어 반죽하고
팥앙금에 고소한 밤 넣어 가족들
마주 앉아 도란도란 예쁘게 송편 빚는
즐거움 알록달록 뾰족코 예쁜 꽃고무신
추석빔으로 사오시는 아버지

기다리는 한가위의 저녁 무렵은
날아갈듯 기쁜 날이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귀뚜리
찌르레기의 노랫소리에 흥을 돋우며
가족들의 재잘거림으로 북적한
한가위의 저녁 고즈넉한 시골
고향의 밤은 정겨움으로 무르익어 갑니다.
(박현희·시인)
+ 한가위에

한가위 할머니 제사상 차리는 것 보니
음식솜씨가 어른이 다 되었구나
딸아, 네가 있어 내가 살고 있음을
나 감당할 수 없이 행복하구나

어느새 훌쩍 커 벼려 좋기도 하고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것이려니 하니
서운한 생각이 미리 들기도 하지만
네 등뒤에 선 내 작은 키가
오랜만에 당당해진다

딸아, 너도 엄마만큼 울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랴
가을날 쓸쓸한 강둑을 헤매는 엄마처럼
너도 가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
이 어미 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내 가엾은 딸아

그러나 딸아
이 엄마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
횃불로 타오른단다
네 꿈도 활화산처럼 타올랐으면 좋겠다!

사람은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더구나
잘 생겼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더구나
주님 앞에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참 행복해질 것 같애
올해 한가위 명절에 할머니 제사상 차리는 네 손길
아직은 철부지 대학생 어린 나이로
근사한 제사상 차려낸 정성과 솜씨처럼
곱게 잘 살아가기를 훌쩍 커버린
네 키 아래서 나는 빌고 빌었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등 굽은 내 등뒤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딸아!
(박성희·시인, -2010)
+ 한가위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치마폭에서 달이 뜨는 날입니다

아스라한 황톳길을 돌아
대 바람에 실려온 길 잃은 별들도
툇마루에 부서지는 그런 날입니다

밀랍처럼 곱기만 한 햇살과
저렇듯 해산달이 부푼 것도
당신이 살점 떼어 내건 등불인 까닭입니다

새벽이슬 따 담은
정안수 한 사발로도
차례 상은 그저 경건한 풍요로움입니다

돌탑을 쌓듯
깊게 패인 이랑마다
일흔 해 서리꽃 피워내신 신앙 같은 어머니,

다만 살아온 날 만큼
당신의 고운 치마폭에
두 무릎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비친 웃음 한 소절
입김으로 펄펄 날리며
모두가 오래도록 그랬음 정말 좋겠습니다.
(최광림·시인)
+ 한가위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구상·시인, 1919-200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이성복의 ´추석´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