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정연복의 ´어머니 산(山)´ 외
<산 시모음> 정연복의 ´어머니 산(山)´ 외
+ 어머니 산(山)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
드문드문 우람한 바위들과
아가 손 만한 작은 돌멩이들
훌쩍 키 큰 나무들과
앉은뱅이 이름 없는 풀들
숨가쁜 오르막길과
편안한 내리막길
전망이 탁 트인 능선과
푸른 잎새들의 그늘 속 오솔길
천둥과 번개와 벼락
벼락 맞아 쓰러진 고목들
산은 너른 품으로
말없이 이 모든 것을 포옹한다
오!
어머니 산(山)
+ 산을 오르며
우람한 산 앞에 서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
겸허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교만이 고개를 치켜드는
아직도 많이 설익은 나의 인생살이를
산은 말없이 가르쳐 주지.
높음과 깊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
깊숙이 내려앉기 위해
가파르게 오르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말없이 산은 내게 이야기하지.
+ 오대산, 노인봉을 오르며
나 어릴 적
엄마의 젖무덤 같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이굽이 펼쳐지는
오!
저 평화의 능선들
하늘 도화지에
파란 물감을 푼 듯
구름 한 점 없는
순수의 하늘을 우러르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세속의 미움과 욕심이
옷을 벗는다
+ 삼각산, 보현봉을 오르며
완만한 사자능선의 저 끝에
칼날처럼 서 있는 보현봉
그 무슨 애틋한 사연
남몰래 가슴속에 있어
한 아낙네는
속세의 인연을 끊으려
이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왔을까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으로 슬픔을 삼켰을까
저 먼 옛날
어느 아낙의 아픔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어제도 오늘도 말없이
서 있는 보현봉
+ 유월의 산
산의 말없이
너른 품에 들어서서
유월의 푸른 이파리들이
총총히 엮어 드리운
그늘 진 오솔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
내 몸에도 흠뻑
파란 물이 든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옹졸해진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어느새 쪽빛 하늘이 되고
세상 근심은 솔솔
바람에 실려 아스라이 흩어진다
+ 산
일년 사시사철
말이 없는 산
세월이 오고
세월이 가도
한평생 입 한번
뻥끗하지 않는 산
바람소리 새소리 사람소리
품어 안을 뿐
천 년 만 년
그저 침묵하는 산
우람한 덩치에도
아랑곳없이
늘 그 자리
그 모습으로
말없이
말하는 산
+ 산
어제는 눈부신 쪽빛이더니
오늘은 희뿌연 잿빛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폭우 속에
신들린 듯 춤추는
저만치 나무 잎새들
그래도 저 멀리
보이는 도봉산은
미동조차 없는
한 폭의 정물화 같다
흔들림 속의 저 의연한
한 점 고요!
산은 말없이
한 수(手) 가르쳐 준다
+ 도봉산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하늘인가
굽이굽이 능선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으스대지 않고서도
사뿐히 하늘에 가 닿은
저 도봉산의
고요히 의연한 모습
혹한(酷寒) 속에
하늘은 한층 푸르고
도봉산은
더 초롱초롱하다
+ 도봉산에서
어둠이 사르르
커튼처럼 내리는
도봉산 자운봉 오르는
비스듬한 길 중턱
이제는 정이 든
바위들 틈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의
행복한 성찬을 차렸다
저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집마다
귀가(歸家)의 불빛은
점점이 포근한데
저기 우람한 산봉우리는
말이 없네
+ 행복
도봉산 다락능선
오르는 길
봄기운 품은
나무 곁
편안한
바위 의자에 앉아
솔잎 향기
배경으로 두르고
저 높푸른
하늘바다 속에
풍덩 잠긴
반달 우러르며
마시는 뽀얀
막걸리 한 잔에
그리운 얼굴 하나
삼삼히 어리네
+ 도봉산
굽이굽이
길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 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 사랑을 훔쳐보다
소요산 자재암 지나
하백운대 가는 길
가을은 벌써 깊어
낙엽은 쌓이는데
문득 바라본
저 멀리 서쪽 능선에
아슬아슬 걸친
고운 햇살.
가지 말라고
온몸으로 붙드는 능선과
이제는 가야 한다고
손사래 치면서
연분홍 눈물 쏟으며
슬금슬금 멀어지는 햇님의
쓸쓸하고도
어여쁜 연애(戀愛).
뜸을 들이면
이별도 저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 겨울산
산은
늘 말이 없지만
겨울산은
더욱 고요하다
저 큰 몸집으로
하늘과 땅을 이으면서도
제 하는 일 아무것도
없는 양
있는 듯 없는 듯
영원을 살아가는
온몸이 너른 가슴이고
다소곳한 귀일 뿐
말없는 산
+ 산사람
그렇게도 산이 좋을까
이틀이 멀다 하고 산과 벗하더니
너의 마음도 살며시
산의 빛깔로 물들었을까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들
굽이굽이 이어지는 능선과 아기자기한 샛길들
우람한 바위들과 작은 돌멩이들
햇살과 달빛과 별빛과 바람과 이슬
키다리 나무들과 그 틈새의 이름 모를 풀들
지저귀는 새들과 보일 듯 말 듯 날벌레들까지도
오순도순 한 식구로 품어 주는
말없이 넉넉한 산 마음을 닮아
너는 어느새 산사람이 되었나 보다
이제 너의 이마에는
세월의 고랑처럼 주름살이 패였어도
그 모습 그대로 보기 좋아라
너의 곁에 맴돌기만 해도
산 냄새 물씬 풍기는
옹달샘 샘물처럼 맑은 영혼의
그대, 아름다운 산사람이여!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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