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7일 일요일
김지헌의 ´봄 풍경´ 외
<사계절의 풍경> 김지헌의 ´봄 풍경´ 외
+ 봄 풍경
풀섶에서 민들레 꽃 하나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물씬 다가선 봄내음에
쑥대머리 보릿대궁
바지를 적신다.
덩더쿵
덩더쿵
한 다리 들고 기우뚱이는
보리 바다의 물결이여
초저녁 별 하나
솟을 무렵
먼 지평을 울려오는
봄 바다의 말발굽 소리여
(김지헌·시인, 1956-)
+ 풍경
여고 3학년 숨가쁜 자습교실
학생들이 읽고 있는 창백한 교과서 위로
지금 막 새 옷을 입은
오월이 지나간다.
적막은 그들의 내일을 위한 예비
눈시울을 젖게 하는 저 맹세의 눈빛들을
하나 둘 흔들어 보며
바람은 기웃거리고.
햇볕이 레이스처럼 나뭇잎에 걸리고 있다
옷고름을 풀고 싶은 자목련 봉오리들이
몇 명의 학생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우걸·시인, 1946-)
+ 보리밭 풍경
낮 열두 시
기차는
푸른 보리밭으로 들어가고
땡볕 흔드는
매미 울음소리 사이로
새참을 이고 가는 아낙도
푸른 보리밭으로 들어간다
학교가 끝난 한패의 아이들도
자전거 탄 우체부도
보리밭으로
보리밭으로
모두 푸른 보리밭으로 들어가고
지금은 보리밭만 보인다.
(김상현·시인, 1947-)
+ 풍경
여름날 울타리 밖
옥수수밭의 바람소리
고추밭 가장자리
철조망 사이로
잠자리 날고
호박잎에
빗방울 떨어지면
소쿠리 가득
감자를 이고 오시던
어머니
흙 묻은 치맛자락으로
땀을 닦으며
비 설거지로 바쁘셨지
화덕에선 수제비가 끓고
우린 툇마루에 앉아
여우비 지나간 하늘을 보며
참으로 시원했지
그 옛날에......
(박현자·시인, 경기도 양평 출생)
+ 가을 풍경
여름내 안 지치고 뽐내던 나뭇잎은
차차로 투명한 하늘을 닮아가고
사자평 억새꽃 물결은 바람인지 손짓인지.
(강세화·시인, 1951-)
+ 풍경·1
메뚜기가 서방님을 등에 업고
방아깨비가 제 마누라 등에 업혀
들판을 난다
메뚜기 방아깨비 뱃속엔
또 다음 가을이 잉태되고
(손석철·시인, 1953-)
+ 가을이 걸려 있는 풍경
한 점
하늘을 안고
낙엽이
바람과 씨름을 한다.
山을 타고 내리던
갈잎의 대화도
이제 곤히 잠들어 가고
들녘을 지키던
허수아비
구성진 춤가락도
수숫대 울타리로 찾아들면
가을은
한 잎
낙엽에 걸려
단풍나무 가지에서
붉게 타고 있다.
(김재흔·시인, 1935-)
+ 가을 풍경
꼬불꼬불 산 고갯길
겨우 버스 한 대 지나다니는 시골길
그 신작로 옆에
나의 시선을 끄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얼굴은 화사하지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너그러운
정감이 가는 그러한 시골 여인이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지아비를 줄 새참을 이고 있었다.
밝은 표정이었다.
등에는 갓난아이가 업혀 있었고
옆에는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종종 걸음을 하는 여자아이도 있었다.
앞에는 오빠처럼 보이는 사내아이가
길가에 있는 코스모스를 꺾고 있었고
개구쟁이 그 아이도 신나는 표정이었다.
고구마 수확을 하는가보다
비닐을 거두어 내고 호미질을 한 번 하니
어린아이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참으로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아내에겐 더 없는 고마움이었다.
머리에 댕긴 수건으로 남편의 얼굴을 닦아주며
큰 대접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 권한다.
참으로 행복한 풍경이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푸른 가을 하늘과 넓고 넓은 들녘이
모두 그들의 세상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었다.
(김낙영·시인)
+ 가을날의 풍경
산들바람에 연지 곤지
화장을 한 잎새들
수줍은 듯 하늘하늘 춤추고
하늘에는 조가비 껍질 닮은 구름이
해변처럼 펼쳐지고
따스한 햇살 살며시 다가와
은빛으로 부서지는 창문 너머
저 야트막한 산은
평화로이 오수(午睡)를 즐기는데
가만히 눈감으면
두둥실 떠오르는 한 사람
오!
당신의 얼굴
(정연복·시인, 1957-)
+ 겨울 아침 풍경
안개인지 서릿발인지
시야는 온통 우윳빛이다
먼 숲은
가지런히 세워놓은
팽이버섯, 아니면 콩나물
그 너머로 방울토마토만한
아침해가 솟는다
겨울 아침 풍경은
한 접시 신선한 샐러드
다만 초록빛 푸성귀만이 빠진
(김종길·시인, 1926-)
+ 겨울 풍경
새치 한 올 뽑아 들고
겨울 하늘을 본다
오래도록 기다리며 눈을 띄워
거목으로 자라난
은행나무여
오늘은 곁가지 잘린 나목이구나
꽃과 새들도 떠나버린
구름의 벗으로
텅 빈 가로수의 손짓
내 응달한 모서리
옹이 맺힌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은 세월을 자꾸 흔들고
까만 머리 숲에서
새치 한 올 뽑아내어
고스란히 불태우고 싶다.
(윤덕명·시인)
+ 겨울 풍경
안개 진 날이면 눈(眼)이 흐리다
달이 훔쳐간 내 반쪽 눈썹 위에
하얀 눈 내리고
그대 기다리다 얼은 가슴
미열의 햇살에 녹아 떨어지곤 했다
손바닥에 새겨두었던 낙엽은
엽서로 부쳐진지 오래였으나
그 긴 말들이 닿기도 전에 계절이 가버릴까
나의 입은 하얀 성에들로 꽉 채워져
서툰 믿음들이 나를 세우지 못하는 날이면
시린 입을 불며 강가로 나가야 했다
흔들리는 수면과 길고 지루한 억새의 몸짓을
지나치는 풍경에 가로로 짜 맞추며
목적 없이 키운 그 가로의 풍경 속에서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대의 소식은 연착되어 겨울은 길었고
내가 도려낸 풍경의 조각은
어느 서랍 안의 낯선 편지가 되어
해묵은 날들을 정리하는 날이면
남방을 떠나가는 기러기의
하얀 울음을 들려주곤 했다
(이종은·시인, 1976-)
+ 풍경
이 겨울이 가고 눈 녹으면
나는 사북이나
고한으로 갈 것이다.
아직 거기 사는
이원갑 씨를 불러,
소주 세 병쯤 나눠 마시고 나서,
밤 깊은 정암사로 갈 것이다.
´太白山淨岩寺´라 적힌
일주문 지나
공중전화 부스 옆
화장실 지나,
천년동안 거기 서 있는 정암사 주목 옆,
적멸궁 옆길을 돌아
이 절, 골짜기에 사는 천연기념물,
열목어들도 깨지 않게
가만 가만히 계단을 오를 것이다.
산등성이에 올라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수마노탑 5층이나 6층쯤,
그 탑의 처마 끝까지 가서
풍경 하나로 매달릴 것이다.
이제는 광부들도 떠나고 빈집뿐인
사북, 고한 얇은 슬레이트 지붕의
광부 사택 쪽에서 추운 바람 불어오면,
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뎅그렁, 뎅그렁,
쇠 소리로 울 것이다.
(이건청·시인, 194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임보의 ´바보 이력서´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