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3일 토요일
<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시 모음>
+ 살아서 지옥을 본다
마치 지옥 같다
살아서 생지옥을 보는 것 같다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자꾸 연상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단어가
오늘 여기에 다 모였다
침몰 파손 붕괴 공황 폐허 좌절 애통 재앙 죽음
약탈 강간 폭행 총격 공포 유린 오염 질병 시체
아수라장 아비규환 망연자실 속수무책 무법천지
초강력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큰기침 한 번 하면서 지나간 것뿐인데
뜨거운 날씨에 그저 땀 좀 흘린 것뿐인데
물이 많아 홍수로 넘쳐도
정작 마실 물이 없어 갈하다
말, 말은 억수로 많은데
이재민에게 진정 위로될 말은 적어 슬프다
바람 앞에 먼지 같은 인생
폭풍 앞에 티끌 같은 인생
자연재해를 통한 하늘의 뜻을
이 시간 곱씹어 깨달아야 하느니
춤을 춘다고 다 흥이 나는 것이 아니군
숨을 쉰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군
(오정방·재미 시인, 1941-)
*2005년 8월 29일 새벽, 초대형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 동남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인근을 강타하여 수백 명의 인명피해와 9·11을
능가할 만한 재산 손실을 입혔다.
+ 하늘에는 많은 루사가 있다
저녁에 태풍 루사가 동해안에 왔을 때 내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와 고라니와 사람이 뒤엉켜 물에 떠다니는 걸 보았다
물은 평등했다
루사는 산을 헐어 길을 냈거나 개울을 돌리고 마을을 만든 곳을 찾아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되돌려놓고 갔다
그렇게 거침없었다
맑은 날에도 쳐다보면 해와 별과 바람과 하늘에는 많은 루사가 있다
(이상국·시인, 1946-)
+ 상처 입은 사람을 사랑할 때
깊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 상처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문제삼는 일이다.
단순히 거기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그것으로부터 물러나 있어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혼의 부드러운 빛을 그 상처에 비춰라.
(존 오도나휴·아일랜드 시인이며 철학자, 1916-)
+ 고난기에 사는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벗들이여, 암담한 시기이지만
나의 말을 들어주어라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한 것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굽이진 오솔길을 영혼은 걷는다.
그의 말을 읽는 것을 배우라!
오늘 괴로움인 것을, 그는
내일이면 은총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것만이 죽어간다.
다른 것들에게는 신성(神性)을 가르쳐야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영혼이 깃든 마음을 기르는
그 최후의 단계에 다다르면, 비로소
우리들은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으리.
거기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
(헤르만 헤세·독일계 스위스인 시인이며 소설가, 1877-1962)
+ 인생
인생은, 정말, 현자들 말처럼
어두운 꿈은 아니랍니다
때로 아침에 조금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
어떤 때는 어두운 구름이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재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밝은 시간은 가버리죠
고마운 맘으로 명랑하게
달아나는 그 시간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여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짓누르는 것 같으면 또 어때요?
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서거든요
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
힘있게 우리를 잘 버텨주죠
씩씩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
영광스럽게, 그리고 늠름하게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샬롯 브론테·영국의 여류 소설가, 1816-1855)
+ 들풀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파득파득
구겨진 잎을 편다.
(권영상·아동문학가, 1953-)
+ 두 주먹 불끈 쥐고
온갖 쓰레기 더미 위에
한 송이 민들레 피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역겨운 냄새 풀풀 날려도
코 막으며 살아야 한다고
살아서, 저 파란 하늘 향해
크게 한번 웃어 봐야 한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용케도 잘 자랐구나.
어디선가 나풀나풀 날아와
꽃잎에 입 맞출 나비를 기다리며
어둠 밝히는 등대처럼
꼿꼿이, 환하게 웃고 있구나.
(김소운·아동문학가, 1908-1981)
+ 생명
소나무 가지가 꺾이고
곧게 자란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너른 들이 강이 되어
우리들 앞으로 무섭게 달려든다
벼꽃들이
흙탕물에 흘러흘러 짜디짠 바다로 가
소금물에 우리들의 풍요와 함께 절어지는
좌절의 늪
그 오후 시간에
망연히 바라본 마당 한 쪽
구름 걷히면서
피어오르는 햇살과 함께
장미 두어 송이,
모진 바바람 풍랑이 주는 고통의
낮과 밤에도
너는 내 안에서 고운 꽃송이 키워내고 있었구나
그래, 산다는 것이 뼈 마디마디 절이는
아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으로
상처를 싸매며 사는 게지
(권복례·교사 시인, 1951-)
+ 안개가 짙은들
안개가 짙은들 산까지 지울 수야.
어둠이 짙은들 오는 아침까지 막을 수야.
안개와 어둠 속을 꿰뚫는 물소리, 새소리,
비바람 설친들 피는 꽃까지 막을 수야.
(나태주·시인, 1945-)
+ 희망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문병란·시인, 1935-)
+ 절망이라는 씨앗
산봉우리가 폭발하여
불흙에 손발이 묻히고
땅이 갈라져
얼음바위가 등허리를 덮치고
마침내 최후의 순간
그때 비로소 저 밑의 지하에서
한껏 부풀은 씨앗이 터지고
강철을 밀치며
희망은 한 뼘씩 올라오는 것이다
누군가
절망을 던져놓고
우리들을 시험하는 것이었으니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거나
어둠 속으로 달아날 일이 아니므로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동참하라
흔쾌히 못에 박혀 피를 흘려라
지상에 닿은
비 한 방울에도
무덤에 적신 피 한 방울에도
화들짝 깨어나는 목숨이 있으니
그 모든 절망은
씨앗을 가득 담고 있는
우주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바람 부는 날의 풀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윤수천·시인, 1942-)
+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을 거니는 내 생의 발걸음이
가끔은 휘청거릴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쓸쓸한 삶의 뒤안길은 있는 법
살아가는 일이
이따금 실타래처럼 얽혀
많이 힘들고 괴로운 날에도
살아갈 이유는 남아 있다
맑은 날이나 흐린 날에도
높이 걸려 있는 하늘
사시사철 변함없이
참 의연한 모습의 산과 나무들
따습고 보드라운 햇살
포근한 달빛의 위로를 받으며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정연복·시인, 1957-)
+ 자연 앞에서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빛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었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면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이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렷한 질서가 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침묵이야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법정·스님, 1932-2010)
+ 참다운 문명
참다운 문명은
산을 파괴하지 않고
강을 파괴하지 않고
마을을 망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리
(다나카 쇼조·일본의 정치가, 1841-191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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