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4일 일요일

박현자 시인의 ´돌에 관한 명상´ 외


<돌에 관한 시 모음>

박현자 시인의 ´돌에 관한 명상´ 외
+ 돌에 관한 명상

태초에 그는 무엇이었을까
달 뜨고 바람 불면 흔들리는
박꽃처럼 그렇게 여리기도 했을까

아주 머언 옛날부터
커다란 산이었다가
바위였다가
한때는 원시인의 밥그릇

지금은 정원의 귀퉁이서
혹은 거리 어디쯤에서
미천한 모양으로 살아있을


태초에 그도 나처럼
작은 일에 서럽기도 했을까
굴러갈망정 절망하지 않는
야무진 목숨 하나



(박현자·시인, 경기도 양평 출생)
+ 돌멩이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나태주·시인, 1945-)
+ 조약돌

수천 년을
갈고 닦고도
조약돌은 아직도
물 속에 있다

아직도
조약돌은
스스로가 부족해서

물 속에서
몸을 씻고 있다
스스로를 닦고 있다
(이무일·아동문학가)
+ 돌담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마라
그대는 담을 쌓아 보았는가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워
균형 잡는 세상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마라
돌담을 쌓다 보면 알게 되리니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음을
(김기홍·시인, 1957-)
+ 뒤돌아보기

돌담에 기대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사라진 것들과
남겨진 것들,
그리고 간직할 것들….
(하삼두·문인화가)
+ 돌에 대하여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이기철·시인, 1943-)
+ 아기 돌탑

산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작고 못생긴 돌 조각으로 쌓은 탑 있네
누가 쌓았을까
산처럼 커야 한다고
백장암 삼층탑처럼 높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들패랭이 같은
용담꽃 같은
온 천지 들꽃 같은
애기 돌탑


위에

아래

그것은
돌이
아니라네 탑이라네
산길 가다보니 돌멩이 하나 하나가
두고 온 그대
떠나간 내 모든 그대 얼굴이네

어느덧 지리산도
소슬한 한 채 탑으로 서 있네
(복효근·시인, 1962-)
+ 우울 씨에게

날씨도 맑은데
돌밭으로 가요
돌의 영원성 앞에서는
인생은 하루살이
한결같기에는
돌의 속마음만 하랴마는
돌을 사귐으로
한껏 위로를 받아요
나풀거리던 그 입의 나뭇잎
우수수 낙엽이 되었는가
돌밭으로 가요
날씨도 맑은데
(나석중·시인)
+ 돌에 관한 명상

잔돌이 정다운 건
해남 대둔사 성보박물관 앞 뜰
석축을 보면 안다
큼직한 돌덩이 사이사이에 박힌
살결 고운 잔돌들,
보아라
당당한 덩치에 눌린 것이 아니라
힘으로 채우지 못한
허허로운 공간에서 밀알이 된
저 부처님의 미소 같은 얼굴들
꼭 근엄한 것만이 유용한 것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어머님의 둥근 젖무덤이
사람의 빛깔을 만들었듯
저 우윳빛 잔돌들의 포근함이
경내를 감싸고 있는 것
이제야 깨닫는다
오랜 세월 계곡을 굴러
갈고 다듬은 저 잔돌들
침묵의 돌덩이보다 아름답다
(박명용·시인)
+ 길가의 돌

나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물으시면
나는 맨 끝줄에 가 설 거야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
끝줄로 가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
정말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한 일을 생각해 보라시면
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 거야
하느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정종수·시인)
+ 동글동글

세상의 모든 씨앗들은
동글동글하다

그 작은 동그라미가 움터
파란 잎새들이 돋고

세상의 어느 모퉁이를 밝히는
방실방실 꽃들이 피어난다.

세월의 강물에 깎이고 깎인
조약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가 손 같은 동그란 조약돌 하나
가만히 만지작거리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 없고
평화의 파도가 밀려온다.

흐르는 세월의 강물 따라
이 마음도 날로 동그랗기를....
(정연복)

* 엮은이 :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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