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일 토요일

왕이 되지 못한 유리 왕자

이 땅의 어린 왕자들은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다
현재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 마저 실은 해모수 아버지가
유리왕자가 어느 정도 크면 나머지 잃은 부분을 찾으라고
유화부인에게 건네 준 당시의 반쪽의 칼에 지나지 않는다

유리왕자는 그 때 숨겨진 그 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한 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제왕이 못되고 아직 어린 왕자로서
한반도 금수강산 이 곳 저 곳을 헤메어 다니면서
찢겨진 국토에서 유리 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는 지 모른다

한 나라를 떠맡아 정사를 펼치기에는 힘에 겨운 그는
영원히 어린 왕자가 되어서 의자를 이리 저리 옮기고 다니며
어느 별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이 꽃 저 꽃 구경이나 하는
떠돌이 나그네 김삿갓 같은 삶을 택하였는 지도

전설상의 유리왕자는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원을 제대로 세웠기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려오는 가을밤 잠 못 이루고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바깥뜨락으로 걸어나가 마른 옥수수대에 서걱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팔장끼고 요모조모 고심하던 중, 둥드렷이 밝아오는 환한 보름달 아래

고요가 모여드는 그 시각, 마당에 하늘의 서기가 내려오는 줄을 알았다
신령한 느낌에 심안이 뜨였던가 .쓰러져가는 초가집 오른쪽 서까래아래
서늘히도 밝아오는 어렴풋한 푸른 빛을 보고 이상스럽게 느껴져서
그 곳을 급히 파보자 그리도 찾던 검이 흙속에 묻혀 있다고 하였던가

그러나 실제의 어린 왕자는 늘 어린 왕자로 군림하기를 더 원하였기에
매일 새벽 떡을 팔러나가는 어미의 고생하는 모습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너무나도 막연하기 짝이 없는, 고생의 근원같은 아버지의 행방이라든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언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종일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와 구슬치기와 개구리잡기
이웃 동네 아이들과 패거리싸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매일 흙묻은 옷, 찢겨진 옷을 벗어던지면서 서당공부는 않으며
늦게 까지 바늘질하는 어머니가 한숨 쉬는 것을 모르는 척 하였다

어린 왕자는 늘 무엇엔가 ?기듯이 휩쓸려 다니며 언제나 불만투성이였는 데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아버지도 없는 이 집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겠다는 생각은 커녕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막연한 잡념과 망상과 불안속에 허우적거렸다

세월이 지나 어미가 정해주는 연분을 찾아 혼례는 올렸지만
늘 어미가 차리던 밥이 더 맛있었다고 빨래가 이게 뭐냐고 투정이나 하며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자기만의 색씨를 예뻐해주는 법도 몰랐다
분이라도 사주면서 어떻게 더 노력 좀 해볼 수 없느냐는 말도 할 줄 몰랐다

나무 하러 가서 한 나절은 풀밭에 누워 흰 구름 보고 꿈이나 꾸면서
집안 아궁이에 장작이 떨어져가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나무할 생각도
오두막집 뒤안 한 뙈기 밭마저 아내 몫으로 남겨두고 소 먹이러 간다고
산으로 들로 지천을 헤메어 다니며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오곤 하였다

색씨가 어느날 철없는 신랑 어린 왕자의 버릇을 따끔하게 고치려고
몇 번 고개 넘어 옛날 서당 훈장님 한테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자
날 때부터 오래도록 과수댁 그 집 어린 아들,유리왕자를 지켜본 훈장님은
날 때부터 떡잎을 알아본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만 안됐다는 표정이었다

뱃속으로 아기가 들어서는 기미를 느끼자 색씨는 아무에게도
자기 집의 나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남편, 시어머니에게도 우물가에서 만난 또래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만 할 뿐
누구에게도 도통 자신의 서글픈 처지에 대하여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 때 강 건너 이웃 동네에 사는 검은 수염 부족이 와서 싸움을 걸 때
쟁기와 칼로 힘껏 싸워 물리치지 못하고 동네 젊은 색씨를 다 빼앗길 때도
어린 왕자는 주막집에 가서 늙은 주모만 데리고 술 마시고 푸념 할 뿐
어떻게 제 마누라를 그들로부터 다시 뺏어올 궁리도 못했다

그 중 가장 용감했던 한이가 그 곳 부족장을 만나 외교로 잘 설득해서
한 십년이 지난 후에나 고국에 다시 데리고온 자기 여자, 환향녀들을
어린 왕자들은 죽지않고 살아왔다고 욕하면서 그들이 힘되어 지키지 못해 잃었던
자신의 소중한 여자들. 정조를 잃은 것을 내세워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어린 시절 위대한 어머니 유화부인의 말씀대로 열심히 활 쏘기 연습을 하며
자기를 닦지 아니한 유리 왕자는 이후 팔도강산을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안게 된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 먼 길 떠나본 적이 없는 영원히 어린 왕자는
불평과 불만의 혼란속에 소진하는 어둠의 세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무거운 외투를 입고 뒤뚱거리는 이 나라의 어린 왕자들을 위하여
그의 어머니가, 누나가, 때로 여동생이, 더 나아가 아내와 딸과 연인이
그들을 위해 무거운 외투를 벗겨주거나 곁에서 들어주기도 하지만
그들의 철없음은 하늘이 그들에게 내린 영원한 형벌과도 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