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5일 일요일

함민복의 ´그림자´ 외


<그림자에 관한 시 모음> 함민복의 ´그림자´ 외

+ 그림자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함민복·시인, 1962-)
+ 그림자는 착하다

내가 하는 짓을
보고 그대로 배우는
그림자는 착하다
밝은 곳에서
떳떳하게 하는 짓은
좋다고 따라하지만
어두운 곳에서
몰래하는 짓은
절대 따라하지 않고
도망가 버린다
(신천희·승려 시인)
+ 그림자 절제 수술

그림자를 잘라내자
내 머리보다 앞서가고
내 키보다 길어지는
오만의 그림자.

그림자를 도려내자.
내 마음 검어지면 더욱 짙어지고
내 가슴 깨끗하면 좀더 옅어지는
변덕의 그림자.

그림자를 줄여보자.
내 모습보다 품위 있고
내 몸집보다 풍만한
거품의 그림자.

그림자를 지워보자.
햇빛 피하면 엉큼하고
달빛 아래선 음흉스런
불손의 그림자.

숨기고 감추는 게 많을수록 늘어지고
밝히고 드러낸 게 적을수록 넓어지는
선명한 낙인(烙印)의
그림자를 떼어내자.
(박경현·시인)
+ 그림자도 나이를 먹는다

내 그림자
등 점점 오그라들고
내딛는 발걸음 비치적거린다
흔들리는 팔이
태엽 풀린 시계추 같다

하늘을 쳐다보는 일보다
땅 바라보는 일 잦아져
내 그림자와 자주 만난다

내 그림자
밤도시 헤매는 일 줄어들고
방구석에 누울 때 많아진다
그림자도 나이를 먹는다
차츰 눕는다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 그림자

허공에 한껏 부풀려진 제 영혼을 위하여
그림자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드러눕습니다.

모양과 부피가 각기 달라도
영혼의 두께는 다 같은 법이라고
모든 존재의 뒷모습을 납작하게 펼쳐놓습니다.

높이만을 최고로 알고 중력과 싸우느라 버둥거릴 때도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높을수록 커지는 위험을 길이로 재어줍니다.

알록달록한 꿈 자랑하며 휘날릴 때
화려한 빛깔들을 가장 단순한 색으로 바꿔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품는 쉼터가 되어 줍니다.

감당 못할 무슨 일로 풀죽은 저녁 무렵이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며
지평선 끝까지 키를 늘이고 어깨 다독입니다.

해를 쳐다보는 동안에는 못 보지만,
방향을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해로 하여 가려진 세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평생 곁에 머물러 날 지켜주다가
무덤에서 비로소 함께 사그라지는
당신, 내 영혼의 짝.
(정진명·시인, 충남 아산 출생)
+ 고독한 신의 그림자

은하계 너머
또 다른 은하계 너머
다시 먼 은하계 너머

터무니없이 아득하고
더욱 아득한

끝없이
끝이 없는 우주의
외딴섬 같은 핵의 자궁으로부터

신의 손짓 내려와
내 숨소리 곁에서 출렁인다

어깨가 많이 굽은
깡마른 독수리처럼 앙상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오래오래 웅크리고 앉아있는

저 고독한
신의 그림자 하나.
(정성수·시인, 1945-)
+ 청춘의 그림자

들창에 어린 그대 모습
달무리 속에서 일렁이네

꿈은 사라지고
은하수도 말랐는데
눈물은 왜 이리 맑고
넘치는지

아련한 청춘의 그림자
시린 발자국 또렷
새기려는가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그림자놀이

만날 사람들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말처럼
이미 만날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좋은 느낌
몰래 간직한 채
서로 해바라기 하다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아닐까

한발만 내디디면 되는데
먼저 손만 내밀면 됐었는데
관객 없는 그림자놀이만 하고 있었나 봐

이제 서로의 마음 확인하고
진실한 마음 내려놓았으니
그리워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서로 아껴주면서 지내고 싶어

사랑의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정은아·시인, 1954-)
+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삶에 대해서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어떻게 사는 삶이 참된 삶인지
수많은 현인들이 그 방법을 제시하나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이 다르기에
진정한 나의 길은 내가 찾을 수밖에
길 위에 이정표가 또 다른 길을 가리키어
세상의 모든 길은
길에서 길을 묻다 결국
내 안의 길로 이어지느니
거기서 나의 길
찾을 수밖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나를 위한 삶이기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텅 빈
나의 문에 이르기 위해
홀로 나를 따르는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어
진정한 나의 존재
만나야 하리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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