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7일 화요일
김승희의 ´꿈과 상처´ 외
<꿈에 관한 시 모음> 김승희의 ´꿈과 상처´ 외
+ 꿈과 상처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로구나
(김승희·시인, 1952-)
+ 꿈꾸지 않는 자, 청춘을 포기했네
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청춘,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청춘,
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한비야·오지 여행가, 1958-)
+ 꿈일기 2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
꿈에서
나는 때로
천사이지만
꿈을 깨면
자신의 목마름도
달래지 못합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꿈꾸는 악기
입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춤추는 손으로 대답한다.
춤추는 가슴으로 대답한다.
우주는 주인 잃은 꿈꾸는 악기,
네가 울면 허공에
별 하나 뜨고
지상의 목숨들은 탈춤을 춘다.
떨리는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바닷가에서
(오세영·시인, 1942-)
+ 꿈
주렁주렁
매달린
꿈
턱 괴고 모로 누워
그저 절로
떨어지기만
농익은 꿈이
짓물러 터지면
허사인 걸
나무에 올라가
가지 흔들어
작대기로 후려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
(공석진·시인)
+ 해변의 꿈
아이들은 검은 발등으로
푸른 바다를 밀어내고
어린 게들은 작은 발톱으로
검은 섬을 밀어올리고…
(임보·시인, 1940-)
+ 꿈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나라에 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공부 많이 한 학생이 되고 싶다고
칠년이 지나도 그 말이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여공이셨다
(이시영·시인, 1949-)
+ 몽당연필의 꿈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 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윤·시인, 전남 해남 출생)
+ 꿈
이 세상에 없는 여자를
꿈에서 안아 보고 기뻐했다
꿈이 시키는 대로 간음하다가
사람에게 들키고는
밤새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었는데
날이 새어 꿈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없는 세상임을 알고는
다시 실망했다
(이생진·시인, 1929-)
+ 꿈을 꾸고 싶다
오늘 밤에는 네 꿈을 꾸고 싶다
절대로 안 된다고 떼쓰지 마라
정말 꿈이란 어딜 가나 지름길이다
꿈만 꾸고서도 하늘까지 갔다온 기쁨
내일 밤에도 네 꿈을 꾸고 싶다
(이생진·시인, 1929-)
+ 새벽의 꿈
깊은 잠 꿈속에서
그립던 사람 만나서
행복했는데
홀연히 사라져 버린
새벽 4시 40분입니다
이야기꽃 피우던
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재촉해 보아도
깨어버린 잠 열려 버린 새벽은
변함없이 찾아오는
한 사람의 방문자를 맞습니다
꿈속의 미소를
현실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리움의 갈증에
냉수만 한 사발 들이킵니다
(손희락·시인)
+ 꿈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아파트 꿈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빛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빛.
(김지하·시인, 1941-)
+ 아내의 꿈
바람도
구름도 한 점 없는
새벽 숲
별빛만 더욱 푸르다.
맨손 체조
윗몸 일으키기
뜀뛰기 운동 끝난 후
겉옷 입으며
별 몇 개 살짝
속주머니에 넣었다.
새벽기도 다녀와
자고 있을 아내
고운 꿈 꾸도록
속가슴 가득
파란 하늘도 담았다.
돌아오는 길은
늘 급해
더러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 별들이
자갈처럼
함부로 발길에 채인다.
(김영천·시인, 1948-)
+ 에덴을 꿈꾸며
별꽃 매일 바라보다
나는 작은 별 되었다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조약돌 던지다
작은 물방울 되었다
거짓말 기계처럼 반복하는
그들을 몰래 미워하다
나도 그들 닮아가고 있었다
두어라
바람에 고약한 냄새
검은 구름 그저 흘러가게
먼 훗날
염소와 사자가 함께 풀 뜯는
그날이 오면
가슴에 오는 통증
서로 위로할 수 있으리
(김종익·시인)
+ 山行의 꿈
더 추워지기 전에
어느 하루쯤은, 혼자서
한적한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하늘 보고 눕고 싶다
쳐다보여지는 하늘이, 이왕이면
뿌옇게 흐려주었으면 더 좋겠고
흐린 만큼 푸근한 가을 숲에서
내가 살고있는 집 주소와
숱하게 드나들던 슈퍼마켓이랑
병목현상이 잦은 출근길,
이런 것들도 함께 쉬이
그 날 하루는 저절로 잊혀졌으면 좋겠다
버거운 시간에 맞추려고
순간 순간들을 토막냈던 기억과
지금 가봐야 할 곳 때문에
미리 앞서서 조바심하는
그런 잡다한 것들을
깜빡 잊어도 좋을, 하늘을
어느 하루는 보고싶다
入山했던 길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하루
(신석종·시인, 1958-)
+ 꿈길
결국
다른 길은 없었다
꿈길 꿈길밖에는
홀린 듯이
구미호에 홀린 듯이
따라서 가자
싫어질 땐
돌아오고
돌아오단 흐느끼며
되돌아가도 되는
버렸다가도
다시 가고 싶어지는
천형의 외길을
피눈물로 등 밝히며
목숨 걸고 가자
캄캄 내 인생의
외가닥 길을 가자
(유안진·시인, 1941-)
+ 새벽 꿈
물방울 하나가
새벽 꿈속에 떨어집니다
꿈속의 물방울은 잠긴 문을 두드려
몽매를 흔들고 우둔을 깨워
내 삶을 적시는 당신의 울음
물방울은
평상의 시간에도 떨어집니다
돌아다 볼 어제가 아닌
미루어 둘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
눈동자 위에
핏방울처럼
채찍처럼
잠긴 문을 밀고서
아프게 날 깨우는
당신의 근심
당신의 사랑
(이향아·시인, 1938-)
+ 나는 내 꿈대로 살겠다
죽는 날까지
비록 그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라도
나는 내 꿈대로 살다 가겠다
이 짧고도 긴 세월
슬픔만큼이나 비가 내렸고
외로움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날들
언제 올지 모를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시 따스한
빛 같은 봄 당신을 기다리고
황홀한 여름 당신을 맞이하며
넉넉하고도 풍만한
당신 가을 어깨에 기대어
겨울로 죽어갈 때까지
온갖 어둠도 뚫고 걸어가겠다
단 한번뿐인 생애
차갑게 얼어붙은
내 가슴에 불을 지피고
무지개가 떠오를 날을 기다리겠다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
너를 기다리겠다
꿈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다
이 세상 생명 있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나명욱·시인)
+ 꿈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재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꼬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꾼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문정희·시인, 1947-)
+ 창녀의 꿈
한가지 하늘 아래
값싼 정조의 야속함이
혼자뿐이랴만
눈부셨던 장래의 꽃
밝은 향기 어찌하고
그늘에 숨어
꽃잎에 살충제 바르며
가는 봄 썩히어도
양심에 간직한 부끄러운 눈망울
아직 맑은데
창가에 젖는 달빛은
오늘 따라 이리 밝으냐.
지껄이는 바람마다
자존심을 꺾는
죄 아닌 죄
세월 따라 고개 숙이며
갈수록 부서지는 혼
쾌락 아래 흩어지는데
헛발 디뎌 휩쓸려 온
유혹의 강물 속에
숨막히는 시절이
밤마다 새로운 색깔로
순정의 눈을 가려
희망의 꿈속 헤매노라.
(이종섭·목사 시인, 1940-)
+ 나뭇잎 꿈
나뭇잎은 사월에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몽글몽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도종환·시인, 1954-)
+ 나무의 꿈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
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문정영·시인, 전남 장흥 출생)
+ 나무 백정의 꿈
눈부시도록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코끝이 찡한 감동이 아니라도 좋다
참 말을 해 다오
내 아버지의 투박한 손처럼
삶을 닮기만 한다면
어느 숲속 무명의 새처럼
듣는 이 없어도 노래하리니
웃지 못할 농담처럼
나를 울려 다오
곧게 뻗은 한 그루의 나무를
베어 넘기기에 부끄럼 없도록
의미 있는 도끼질이 되게 해 다오
(이선명·시인, 1978-)
+ 풀씨의 꿈
끝까지 몰려봐라 끝까지 몰리면 누구나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예각의 귀퉁이를 이룬다.
얼마 전까지 앵벌이 꼬마가
두 손을 벌리고 앉아 있던 육교
계단 한 귀퉁이에 흙무더기가 도보록하다.
아이는 어디로 가고, 포장도로밖에 없는 이곳에 웬 흙무더기인가
그제사 지하철 공사장에서 끓어오른 먼지와
오르내리는 사람들 신발 바닥에서 떨어져 내린
흙부스러기를 떠올린다, 차량의 분진과
잠시 앉았다 떠오르는 황사를 끄집어내려
비바람에 쓸어모았을 귀퉁이, 건조한 날이면
애써 모은 흙알갱이들이 쉬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나가면서 뱉어낸 가래침방울까지 달게 받아먹었으리라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해 발 동동 구르며 떠돌던 씨앗 하나를 품고
떨어져 내리는 치욕으로 기꺼이 목을 적셨으리라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거무튀튀한 흙빛 낯짝이 못내 거북하다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던, 스쳐 지날 때마다
포장도로만 딛고 온 발목 께가 자꾸 슬며시 욱신거려오던 그곳
오늘 아침 어린 풀잎이 하나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다.
(송유미·시인)
+ 돌멩이의 꿈
성난 발길질이라도 좋아
아무데나 내동댕이쳐진대도
따뜻한 그 손길에 닿을 수 있다면
날아가는 그 순간
짧은 꿈을 꾸는 나는 새가 되지
풀섶에 떨어진대도
물수제비 다 건너가지 못하는
강물 속에서라도
또 한 번의 그 손길을 기다리는
깊은 꿈을 가질 수 있다면
하찮은 돌멩이라도 좋아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가 아니어도 좋아
추락하면서
그대의 맑은 유리창을
깨지만 않는다면
(나호열·시인, 1953-)
+ 달팽이의 꿈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 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날개로 흩어진 미세한 먹이에 불과한 것이다
최초의 본능으로 미련을 버리자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될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이윤학·시인, 1965-)
+ 구두의 꿈
소우주 하나 두 팔로 떠받치고
굳은 살 두터운 아스팔트 걷는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길을
서툰 걸음 그대와 보폭을 맞추며
걷고 또 걸어 길 위에서 보낸 내 한평생
온몸으로 전해오는 그대 삶의 무게가
콧등이 시큰하도록 기꺼웠었지
하루의 끝에 서도 길은 끝나지 않아
더 가야할 길이 눈앞에 펄럭이는데
우주를 내려놓고 이제 그만 쉬라 한다
두 어깨의 한없는 가벼움에 놀라 깬 새벽
그 허전함에 다시 또 잠들지 못해
흰 날개를 달고 지상을 떠도는
신발장에 갇힌 아틀라스의 꿈
(홍은택·시인, 1958-)
+ 고래의 꿈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송찬호·시인, 1959-)
+ 열매를 꿈꾸는 새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
(이정록·교사 시인, 196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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