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4일 수요일

복효근의 ´슬픔에 대하여´ 외


<슬픔 시 모음> 복효근의 ´슬픔에 대하여´ 외

+ 슬픔에 대하여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복효근·시인, 1962-)
+ 보석의 노래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시간을 으깨 만든
이건 오직 나의 것이에요
……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정희·시인, 1947-)
+ 따뜻한 슬픔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 있다.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
(조병준·시인, 1960-)

+ 이 슬픔을 팔아서

이 슬픔을 팔아서
조그만 꽃밭 하나 살까
이 슬픔을 팔면
작은 꽃밭 하나 살 수 있을까

이 슬픔 대신에
꽃밭이나 하나 갖게 되면
키 작은 채송화는 가장자리에
그 뒤쪽엔 해맑은 수국을 심어야지

샛노랗고 하얀 채송화
파아랗고 자줏빛 도는 수국
그 꽃들은 마음이 아파서
바람소리 어느 먼 하늘을 닮았지

나는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 하나 살 거야
저 혼자 꽃밭이나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하며 살 거야
(이정우 알베르토·신부)
+ 슬픔의 돌

슬픔은 주머니 속 깊이 넣어 둔 뾰족한 돌멩이와 같다.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당신은 이따금 그것을 꺼내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을 때라도.

때로 그것이 너무 무거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힘들 때는
가까운 친구에게 잠시 맡기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주머니에서
그 돌멩이를 꺼내는 것이 더 아쉬워지리라.
전처럼 무겁지도 않으리라.

이제 당신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때로는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돌멩이를 꺼내 보고 놀라게 되리라.
그것이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손길과 눈물로
그 모서리가 둥글어졌을 테니까.
(작자 미상)
+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렇게 푸른 잎들이 날빛을 짜는 동안은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녁이면 수정 이슬이 세상을 적시고
밤이면 유리 별들이 하늘을 반짝이고 있는 동안은,
내 아는 사람들 가까운 곳에서
펄럭이는 하루를 씻어 널어놓고
아직 내 만나지 못한 사람들
먼 곳에서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엮고 있는 동안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만지고
햇빛이 순금의 깁으로 들판을 어루만지는 동안은,
우리들 삶의 근심이 결코 세상의 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밤새 꾸던 꿈 하늘에 닿지 못하면 어떠랴
하루의 계단을 쌓으며
일생이라는 건축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그 아름답고 견고한 마음들 눈감아도 보이는 동안은
그들 숨소리 내일을 여는 빗장 소리로
귓가에 들리는 동안은
(이기철·시인, 1943-)
+ 슬퍼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노혜경·시인, 1958-)
+ 나의 슬픔에게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 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 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 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 소리,
바람 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 주고 싶다.
(이태수·시인, 1947-)
+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에 손을 대어 본다
그리고 들여다보면 손금 속에는 작은 강물이 흘러

랄랄라 랄랄라 숨죽여 노래하듯 울고 있는
눈물 젖은 날개 상한 깃털들 그 강물 속에 보이네
청이도 홍련이도 민비도 죄 모여 앉아서
가만가만 그 깃털들 말리고 있어 가슴이 저려서

갸웃이 고개 숙이고 조금씩 조금씩만 걸어가지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갸웃이 바라본 그것
얼마나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지 얘기해 줄까
(김정란·시인, 1953-)
+ 역설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는다
슬퍼서 소금이 된 알갱이는 빛을 머금어 투명하지만
썩은 슬픔은 검은 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썩어서 흘러나온 눈물이 마음을 적시고
마음을 키우는 거름이 된다면 나 또한
그렇게 푹 썩은 슬픔에 젖어
뒤돌아 훔쳐낸 눈물이고 싶다
덜 썩어 비린 풋냄새 나기 전에, 혹시는
썩다가 원색의 악의 꽃이 번져 중독되기 전에
아랫목 술항아리 불룩하고 따뜻한 뱃속
사랑과 미움이 보글보글 끓다가
마침내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몸싸움을 다 끝내고 나면
참 조용하게도
온전히 숙성된 슬픔의 향기로 말갛게 발효되어
한 세상 걸쭉하게 물들일 때
내 몸 어딘가에서는 생수 터져 솟아나고
조만간 슬픔의 향기에 취해 쓰러질
어떤 늙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이운룡·시인, 193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나해철의 ´내 마음의 겨울´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