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5일 목요일

채소밭에서

민둥산 비탈길 고랭지
배추 뽑혀 나간 자리에
철퍼덕 엉덩이 깔고 앉는다
샛노란 고갱이가 꽉 차올라
마음을 달궈내던
지난 시절 바라보기에
배추밭이 그만이다
흙 속에 묻힌
풍성한 둔부를 들어내니
그 속에 핏빛 강물이 깊다
만가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온다
상처가 깊은 걸 보니
길 떠나지 못하고
폐허에 망연자실 서 있던
내 할아버지 모습과 닮았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잎사귀들
폭격 맞고 너덜너덜해진 것이
압록에서 한라까지의
살갗이다
배추 쑥, 하고 뽑아내니
해는 부쩍 ?아지고
묵정밭은 끝도 없이 길어진다
골바람 부는 배추밭에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배추 몇 포기
남은 생을 단념하고
그 자리에서 썩어 간다
다음 해 그 자리에 태어날
누군가를 위해 몸 던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