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일 월요일

정일남의 ´노숙자´ 외


<노숙자에 관한 시 모음> 정일남의 ´노숙자´ 외
+ 노숙자

어느 시대에도 노숙자는 있었다
노숙을 명예로 생각하라
배고픔도 견디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포식을 구하겠느냐

석가도 예수도 발을 뻗고 누울 집이 없었다

뭉게구름의 층층을 공원의 벤치에 누워서 보면
걸어 온 길이 명료해지겠지

광야에서 견디어 보라
사막에서 목말라 보라
걸식하라, 그러다가
생각에 잠긴 눈을 문득 뜨면
가을은 하루의 눈부신 작별에 들고
저녁은 온갖 새들의 노래로 배가 부르다

우리가 진정한 고뇌를 맛보지 않으면
누가 달관의 경지에 이르겠느냐
(정일남·시인, 강원도 삼척 출생)
+ 집시의 기도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었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 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 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이 끝자리에서
잠자리를 걱정하며
석촌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난마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삼아 물 마시듯 벌컥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돼, 아빠! 안돼˝ 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나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자의 詩)
+ 인생은 노숙자

물은
물이라서 아래로 흐르고
바람은
바람이라 날아가는데

어깨에 짐 풀지 못해
흐르지도 날지도 못하는 집시
터벅터벅
가는 곳이 어딘지

서산에

걸어놓고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갈거나
(하영순·시인)
+ 노숙자

대왕고래 뱃속 같은
썰렁한 지하도에

아저씨 몇 사람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취한 듯 그 옆에 누운
눈물 글썽한 소주병들.
(신현배·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 IMF풍경 3- 노숙자

양지의 꽃들 환한 웃음
창 너머 불빛 퍼져갈 때
풀은
오늘도
혼자 울었다

그 울음 들판을 적실까봐
애기똥풀 놀란 잠 깨울까봐
풀은
속울음 몰래몰래 꺼내 울었다

바람머리 맞은 뽑히지 않는 파편
음지에서 음지로 웅크린 발가락
먹구름 천둥 속에서
울음이 키운 것은
제 몸보다 커진 가슴이었다
(강초선·시인, 1955-)
+ 노숙자를 생각하며

내팽개쳐진 희망이
바닥을 뒹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을 턱걸이했을까

도막 난 꿈을 어둠에 꿰어놓고
힘없이 구부러지는 밤

낡고 해진 옷섶
겨드랑이에 피는 따스함일랑
비틀린 현실에 접어두고
저당 잡힐 내일도 없이
날 선 겨울바람에
쓰러져 눕는 하루

살 저미는 아픔
잃어버린 과거에 묻고
흘러내린 얼굴
추스를 사이도 없이 돌아오는 아침

새날이 오라
새 삶이 오라
기도할 수 있다면
(이창윤·시인, 1962-)
+ 노숙자의 하루

이른 새벽 지하도 작은 공간
사람들 발자국 소리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갈 곳도 없고 오라는 곳은 없어도
이곳 저곳 급식소를 맴돌며
하루 한끼의 끼니를 때워야 했지요

햇볕 드는 벤치에 쭈그리고 앉자
내 품는 담배 연기 속에
지난 헛된 생활에 후회를 해보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뿔뿔이 헤어져버린 가족들 보고파
흐르는 이 눈물 어이하면 좋을 거나
또 가족들에게 지은 죄는
어찌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꼭 재기를 하겠다고
아니 꼭 일어서고 말겠다며
헤어진 가족들과 다시 만나거든
이젠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금니 깨물며 다짐을 하지요

신문지 몇 장에 움츠린 몸을 덮고
한번만이라도 가족들 만나 보고파
꿈이라도 좋으니 눈을 감으면
흐르는 눈물 속에 잠이 들고 맙니다
(손채주·시인)
+ 노숙자의 새벽

잠을 걷어내는 새벽
눅눅한 신문지 틈새로
몸을 휘감아 일으키는 찬바람,
무작정 거리로 나서면
인적 없는 휑한 길을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차량들
그렇게 급히 가야 할 곳
있어서 좋겠다

생각 없는 몸은 앞서가고
마음은 얼기설기 얽히고 있는데
희멀건 가로등 아래
바람 따라 밀려왔다가
수북히 스쳐간 하루살이들,
사방을 몇 번이고 둘러보아도
서둘러서 가야 할 곳
없다 잠시라도 마음 둘 곳
어디에도 없다

기다리는 아침은 왜 이리도 더딘가

도시는 절벽으로 막아서고
산발한 거미 한 마리
가파른 새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양해선·시인, 전북 군산 출생)
+ 노숙자의 밤

밤거리엔 공허한 가로등만
구부리고 앉아있고
삐거덕거리는 내 몸뚱아리는
힘겹게 매달린 삶의 의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바람소리 닮은 긴 한숨소리는
휘청이는 걸음걸음 뒤따라오고
질긴 삶 팽개치려는 낌새 눈치 챈
가로등은 눈만 껌벅이며 외면하고

죽음보다 진한 고독의 그림자는
구석구석 산산이 부서진
영혼 위에 주저앉아
희멀건 웃음으로 비웃고 있다

버리고 또 버려야 할
슬픈 노래들은 날카로운 이빨이 되어
삶의 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하얗게 웃고 있다
무너지는 내 영혼 위에서
(전월석·승려 시인)
+ 노숙자

나는 집을 잃었네 사랑을 잃었네
그녀를 잃었고 마지막으로 나마저도 잃었네
그저 이 한 몸 누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집이 되고 허기를 달랠 수 있을 만큼의
밥 한 공기면 나의 육체는 만족한다네
나는 이미 사랑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그리고 나를 잃었다네 가끔 길 한가운데를
도르르 굴러다니는 나의 영혼을 본다네
나는 어디에도 있다네 신문지를 덮고
누워있는 나를 조심스레 곁눈질하며
바라보다 흠칫 놀라 달음질치던 당신의
심장 속에도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하나의
오만한 핏방울로도 나는 살고 있다네
이 지하철 구내의 음습한 공기 속에도
마른 얼굴의 내가 둥둥 떠다니고 무료 급식소
가는 길에 맥없이 누워 있는 초췌한 돌멩이가
바로 나라네

나는 집을 잃었네 사랑을 잃었네
그녀를 잃었고 마지막으로 나마저도
오롯이 잃어버렸네
그런데
그대는
오늘 무엇을 잃었는가?
(장세희·시인)
+ 퍼포먼스 - 노숙자

서울역 지하도 얼어붙은 노숙자에게서 배운 것은
저렴한 설움
이 미숙한 연기를 인사동 보리수 카페에서
박스를 펴고 신문지를 깔고 배낭에서 막걸리를 꺼내는
형편없는 가짜들
두목은 마이크 앞에서 시를 읽고
거제도에서 올라온 가짜는 젓가락으로 감정을 두들기고
금산에서 올라온 머리 긴 가짜는
기타를 치다가 술을 마신다
두목도 시를 읽다가 술을 마시며
´자 마시자, 한잔의 술´

이런 공연을 하면서 미안한 것은
영하에 얼어붙은 진짜들의 설움
관중은 공짜 같은 가짜에 현혹되어
진짜를 외면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가짜다
(이생진·시인, 1929-)
+ 노숙자 눈으로 바라본 세상

대한민국 같은 하늘 아래
벌거벗은 모습으로 태어나
누구는 빌딩에 외제차 끌고
누구는 노숙자로 전락하는 세상

자판기는 돈을 먹고
가진 자의 눈높이 세상
없는 자는 자판기 구멍 속에
넣을 돈도 긁을 신용카드도 없건만

퉁퉁 분 라면 건져 올리는
나무젓가락 같은 삶을 사는 사람
비싼 스테이크 썰며
50년산 양주에 금가루 섞어 마시며 사는 사람

잘난 세상
가진 자에게 천상이오
없는 자에게는
열쇠 없는 단단한 금고였으니

생살 찢을 듯한
가난한 늙은 노숙자 눈빛에 울컥
천 원짜리 한 장 건네며
빌어먹을 세상 욕지거리 나는
세상 속 부끄러운 손이 운다
(이민숙·시인)
+ 노숙자의 주검

인적 끊어진
역 대합실
고달픈 삶의 나래
고이 접어 두고
차디찬 지표면에
흔적만 남긴 채
한 점 흙으로 돌아가다

삶과 죽음이
인간사
마음대로 될 까 만은
노숙자의 본향으로
나의 본향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그곳을
질기디 질긴 생
찬바람에
나부끼는 마지막 잎새이어라
(윤용기·시인, 1959-)
+ 노숙자

지하철역 향한 허전한 발걸음
빈 주머니에 전차표 딸랑 하나
깊어질수록 설움은 더 깊다.

칼날보다 더 시퍼런
사설이 실린 신문지
그들의 고통을 덮어주는
이불일 줄이야.
망명 정부의 고꾸라진 투항자들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서릿발보다 더 하얀 시름에
갈 곳 없는 자에게
전차의 굉음은 처량하다.

차라리 꿈이기를
끈질긴 겨울의 꼬리는
왜 이리도 긴지
따스한 봄이 오거들랑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
네 두 발로 당당히 일어서라.
(이성희·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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