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5일 토요일

이창건의 ´풀의 말´ 외


<풀에 관한 시 모음> 이창건의 ´풀의 말´ 외

+ 풀의 말

바람이 행복이에요.
어디, 바람 없이 피는 풀꽃이 있나요.

바람이 행복이에요.
어디, 바람 없이 맺는 열매가 있나요

바람이 행복이에요
어디 바람 없이 고개를 숙이는 풀잎들이 있나요

바람이 행복이에요.
(이창건·시인, 1951-)
+ 강아지풀

죽은 강아지
땅에 묻어주면
봄에 강아지풀
돋아나는 거 맞지?

다시 만나 반갑다고
꼬리 흔드는 거 맞지?
(박방희·시인, 1946-)
+ 강아지풀

바람의 분량만큼
허리 굽혀 살아온 그대

묻지도 않은 말에
고분고분 답하는 그대

아무 일, 아무 일 없다며
꼭꼭 눈물 삼키는 그대.
(고정국·시인, 1947-)
+ 풀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김종해·시인, 1941-)
+ 풀

내가 풀들을 유독 좋아하는 것은
그 풀들이 저마다
독특한 풀 향기를
내뿜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
센바람엔 팍 자빠져 주고
잔바람엔 살짝 누워 주는,

그윽한 독기를
시푸르게
지니고 있어서기 때문이다
(정세훈·시인, 1955-)
+ 풀 한 포기

역 광장 한 구석
깨진 아스팔트 사이에서
풀 한 포기
삐죽이 돋아나
불안한 하루를 기대고 있다.
스치고
스치고
스치고 지나가는
숱한 사람들
발길 아래서,
오늘 하루
무사(無事)하기만을
손 모아 기도하는
풀 한 포기.
(양수창·시인, 1953-)
+ 착한 길

풀은
풀끼리 서로 길을 막아서는 법이 없더라

주남 저수지에는 가래, 마름,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물옥잠, 자라풀, 생이가래……,
물의 천장을 덮고 있는 것들이
붕어마름, 물수세미, 검정말, 나사말……,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숨통을
선뜻 제 몸 비켜 열어주고 있더라

물 위에 나 있는 저
착한 길들.
(오인태·시인, 1962-)
+ 풀과 숲

바람의 왼발에 걸려
넘어진 풀
푸르게 멍들었습니다.

그래도 숲은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모른 척합니다.

일어설 수 있어
나 혼자도

잘 보라는 듯
몸을 일으키는 풀
푸른 멍이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안 본 척 가만히 내려다보는 숲
엄마의 숲 같습니다.
* 이 시는 대구보건학교 중등부 3학년에 재학 중인 신광섭 군의 작품으로 21세기생활문인협회의 ´2006년 장애우 문학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 똥풀꽃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보면
따뜻해지는 가슴
정다워지는 입술
어떻게들 살아 왔니?
어떻게들 이름이나마 간직하며
견뎌 왔니?
못났기에 정다워지는 이름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혹은 쥐똥나무,
가만히 이름 불러 보면
떨려 오는 가슴
안쓰러움은 밀물의
어깨.
(나태주·시인, 1945-)
+ 노란 애기똥풀

풀숲에 노란 꽃
그것들은 노란 모자 쓴 유치원 아기들 같다
나는 새소리를 듣는데
노란 꽃, 저들은 무엇을 듣고 있을까
나는 사십 년 전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은 올봄에 태어났으니
그만한 과거가 없어서인가
바람에 머리를 흔든다
어린애처럼 예쁘다
나도 흙 속에 발을 묻고 싶다
그러면 가는 뿌리가 나겠지
머리 위에 노란 꽃이 피고
노란 꽃들이 나를 보고 아는 척했으면 좋겠다

우는 꽃이 보고 싶다
정말 우는 꽃을 보면 어떻게 달래지
나도 우는 수밖에 없지
함께 울었으면 좋겠다

줄기를 따면 노란 눈물이 난다
입술에 대면 쓰다
애기똥풀이 말하는 것 같다

그 애는 혼자 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쓸쓸해 보였지만
애기똥풀 그 노란 꽃하고 놀고 있었다
그 애는 어려서부터 꽃하고 놀길 좋아했으니
성공한 셈이다
(이생진·시인, 1929-)
+ 강아지풀을 읽다

한계령 강아지풀들은
미래라는 낱말을 모른다고 한다
그 대신 현재라는 말 속에
한 두어 달 치의 미래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두 달 이상은 믿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인지 모른다
건강하시던 내 어머니
어느 날 문득 대장암이라더니
두 달만에 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로는 나도 미래란 말을 믿지 못한다
무엇이든 바로 지금
신이 허락한 시간 안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꾸 조바심을 한다

한계령의 여름은 너무 짧아서
강아지풀의 한낮도
벌써 해 기울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기에는 너무 짧은 하루

강아지풀은 미래라는 낱말을 모른다고 한다
오늘을 열심히 살다 가면 그뿐
먼 후일 우리 어디에서 무엇으로 피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고 있다
(윤정구·시인, 경기도 평택 출생)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시인, 1921-1968)
+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풀에도 남북
바람에도 남북
구름에도 남북
다람쥐에게, 노루에게, 사슴에게, 늑대와 호랑이에게도 남북이 있는가
양파에게도 남북의 대립이 있는가
흙에게도 남북 사이의 전쟁이 있는가
총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는가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는가
철조망의 쇠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고 있는가
물에게도
새와 벌레에게도 있는가
없다
없다면 큰일이다
우리 모두가 천치 바보라는 증명이기 때문에.
(김지하·시인, 194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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