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8일 월요일

임성춘의 ´쉰 살 즈음에´ 외


<나이 오십에 관한 시 모음> 임성춘의 ´쉰 살 즈음에´ 외

+ 쉰 살 즈음에

늙어 가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더 서럽다.

내 나이 쉰 살

그 절반은 잠을 잤고
그 절반은 노동을 했으며
그 절반은 술을 마셨고
그 절반은 사랑을 했다.

어느 밤
뒤척이다 일어나
내 쉰 살을 반추하며
거꾸로 세어 본다

쉰, 마흔아홉, 마흔여덟, 마흔일곱...
아직 절반도 못 세었는데
눈물이 난다.

내 나이 쉰 살

변하지 않은 건
생겨날 때 가져온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뿐이다.
(임성춘·시인)
+ 知天命

나는 먹이 될 터이니 친구여 자네는,
벼루나 되시게나 진한 먹물 우려내어

하늘에
점 하나 찍고
땅으로 한 획

그어보세
(이설야·시인)
* 지천명(知天命): 나이 ´쉰 살´을 뜻하는 말.
+ 쉰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들이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보다 뒤쳐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려도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정일근·시인, 1958-)
+ 오십이 되면서

옷장 정리를 하다가
나중에 입을 것이라고 해마다 구석으로
모아둔 옷들 밖으로 내놓는다
더 예뻐질
나중이라는 시간이
점점 얇아진다

예쁘다고 사다놓고
사은품이라며 쫓아다니면서 받아온 물건들
한 번도 손이 닿지 않은 접시가 더 많다
그냥 한번 만져본다
텅 빈집에 있다가 문득
아이들 방을 열어 보았을 때처럼
알 수 없는 적막이 손끝에 흐르고

오십이 넘으면서부터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맑은 어두움 보인다
오늘은 신발장을 정리하는데
한동안 좋아라 신던 구두가 나를 보는 것 같다
검은 눈동자가 깊다
(이성이·시인)
+ 우울, 그 오십 이후

애들은 커서 다 떠난 텅 빈집엔
살아온 생이 지겹지 않아서 문득 지겨운
그런 적막이
길바닥처럼 쌓여 무장무장 썩고 있다

둘밖에 없는 너와 나 사이
수저와 수저 사이
밥그릇과 밥그릇 사이

지금 저 사이사이엔
삼시 세끼 굶지 않고 들려오는 밥 씹는 소리 대신
징그러운 고요를 꽉 움켜쥐고
참 오랫동안 구시렁구시렁 흘려보내야 할 소란이 필요하다

안방까지 쳐들어와 놀다가는 무료한 햇살보단
태평한 그 달빛보단
만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울 것 같은
꿈틀꿈틀 살아있는 뜨끈뜨끈한 말
아, 그런 말이 그립다

세상에 어디
´꿈틀꿈틀 살아있거나 뜨끈뜨끈한´ 그런 말이 있을까마는
억지로 치자면
이웃집 할메의 전매특허의 말
´잡놈, 목구녁이 뜨뜻헌게 별 지랄 다 떠네.´
이런 막간 언사라도 있다면…

저 말을 봄처럼은 아주 두진 못할지라도
(곽진구·시인, 전북 남원 출생)
+ 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림질하는 오후
발신인 없는 축하문자가 왔다
내 생일은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누구일까
숫자만 남긴 그와 연결된 내 휴대전화번호 11자리,
쉰 줄에 들어서는 허튼 나이와 들쑥날쑥하는 혈압지수,
감해지는 브래지어 컵 사이즈까지 하루에도 수없이
내가 나를 열기 위해 로그인해야 하는 번호들을 생각하다
옷이 눋는 것도 몰랐다

숫자들의 조합이 몸 속 가득 포화상태다
달력에서 떨어져 차곡차곡 쌓인 날들까지 합쳐
어느 이름 없는 공동묘지번호를 끝으로 정산하겠지
입안 가득 물을 머금어 셔츠 깃에 내뿜는다
검산은 엉터리일지 모른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도 황홀한 밀담도
시간 앞엔 속수무책이었으므로,
그 시간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거라면
굴곡진 상처들 뜨겁게 분출되는 다리미에 눌러붙어
일그러지고 변색되어도 울지 말았어야 했다
승산乘算없는 언쟁 버릴 줄도 아까운 내 것 얹어줄 줄도
나눌 줄도 알았어야 했다
뜨겁게 지지며 가야 할 길이 꼿꼿한 자존심이 아니라
꼭 쥔 두 손바닥 욕심 많은 주름이었음을
가감승제 아직도 헤매는 지금,

돌아보니 오십이다.
(고경숙·시인)
+ 생일파티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문정희·시인, 1947-)
+ 남자 나이 쉰다섯

지나던 길에 꽃 한 송이 보았지
그 꽃 하도 예뻐 꺾어 보았지
어울리는 꽃병에
반쯤 물 담아 꽂아 두었지
몇 날 며칠을 바라만 봐도
참 행복했었지
바람 한 번 쏘이면 그 꽃 활짝 웃었지
햇볕 한번 쪼이면 수줍어도 했지
자꾸자꾸 바라보니 싫증도 났어
버려 버릴까 생각도 해 보았지
모두 잠든 밤중에 12층 창 밖으로 던져 버렸지
그 꽃 내 손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
근데 그게 꿈이었어
시든 꽃 모양을 하고 잠든 아내의
축 늘어진 팔이 내 목을 누르고 있었지
왠지 식탁 앞에 아내 얼굴 바로 볼 수 없었어
낡은 구두 밑으로 밟히는
노란 은행잎을 비켜가며 출근했지
빛 바랜 은행잎 하나 집어들었지
코트 주머니에 넣었어
공연스레 눈물이 나더군
(한옥순·시인, 1957-)
+ 작은 고백

쏜살같이 지나온
오십 여 년

휘익, 한줄기
바람이었네

더러 슬픈 날도 있었지만
은총으로 수놓인 지난 세월.

가없는 하늘의
한 점 구름 같은

이리도 작디작은 나를
당신의 귀한 자녀 삼아 주셨으니

그 은혜
크고도 크옵니다.

이제 얼마쯤 남은
나의 생명 당신께 드리오니

오, 주여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나의 몸, 나의 정신, 나의 영혼
모두 당신의 것이오니.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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