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임보의 ´바보 이력서´ 외


<삶의 여유를 노래하는 시 모음> 임보의 ´바보 이력서´ 외

+ 바보 이력서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임보·시인, 1940-)
+ 마찬가지인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가죽구두 신고 걷는 길
고무신 끌고 못 갈 것인가
어차피 걷고 있는 목적지
마찬가지인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진수성찬 식탁이나
초라한 식탁이나
밥 한 그릇 비워 배부른 것
마찬가지인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넓은 공간에 누우나
좁은 공간에 누우나
내일을 위해 꿈꾸긴
마찬가지인 것을
(손희락·시인, 대구 출생)
+ 넉넉한 마음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김재진·시인, 1955-)
+ 시를 읽으면

시를 읽으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초록 잎이 돋고
분홍 꽃이 피는
나는 한 그루 꽃나무가 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내 마음엔 흙이 있는 정원이 생긴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 집
마당은 없어도.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 길

나는 알고 있다
꼬부라진 길모퉁이 지나면
아름다운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그 길 지나면
또 다른 내리막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길 지나면
힘든 오르막도 있지만
그 옆 옥수수 밭에서 잠시 쉬어 가면 된다는 것을
그래도 늦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길을 가다가 쉬어가도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바쁘다
(홍세희·시인)
+ 너도 느리게 살아봐

수술과 암술이
어느 봄날 벌 나비를 만나
눈빛 주고받고
하늘 여행 다니는
바람과 어울려
향기롭게 사랑하면
튼실한 씨앗 품을 수 있지.
그 사랑 깨달으려면
아주 천천히 가면서
느리게 살아야 한다.

너울너울 춤추며
산 넘고 물 건너는
빛나는 민들레 홀씨
그 질긴 생명의 경이로움 알려면
꼭 그만큼 천천히 걸어야 한단다.

번쩍 하고 지나가는 관계 속에서는
다사로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사랑 한 올 나누지 못한다
쏜살같이 살면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할 것
볼 수 없단다.

마음의 절름밭이일수록
생각이 외곬으로 기울수록
느리게 살아야 하는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단다.
아이야 ,
너도 느리게 살아 봐.
(장영희·영문학자, 1952-2009)
+ 게으름 연습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 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의
식솔들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 대신 가끔 가야금이든
바이올린이든 함께 듣기로 했다.
(나태주·시인, 1945-)
* 진객(珍客): 귀한 손님
+ 구름

하늘 저편
한 점 구름이 가네

꿈결인 듯
구름이 흘러가네

어느새 많이 빛바랜
나의 생(生)

내 목숨의 날들도
그렇게 가고 있겠지.

유유히 흐르는
저 말없는 구름

뭔가 움켜쥐려 안달했던
나의 고단한 손

이제 사르르
펼쳐야 하리

가슴속 애끓는
애증(愛憎)의 그림자도

이제 가만히
내려놓아야 하리.

하늘 저편
한 점 구름이 흐르네.
(정연복·시인, 1957-)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A. 푸쉬킨·러시아 시인, 1799-1837)
+ 여유

그것이 무슨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나뭇가지 아래서 양과 소의 순수한 눈길에
펼쳐진 풍경을 차분히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나면서 수풀 속에 도토리를 숨기는
작은 다람쥐들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대낮에도 마치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가득 품은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다정한 눈길에 고개를 돌려
춤추는 그 고운 발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된 그녀의 환한 미소가
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헨리 데이비스·영국의 방랑걸인 시인, 1871-194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문병란의 ´희망가´ 외 "> 김지헌의 ´봄 풍경´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