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허수경의 ´聖 숲´ 외

<숲에 관한 시 모음> 허수경의 ´聖 숲´ 외

+ 聖 숲

해변이 시작되기 전에 숲이 나타났다
숲으로 갔다
그 숲에 살던 젊은 나무들은 통째로 잘려나가고 없었다
잘려나간 그 자리에서 벌떡거리는 그들의 심장을 나는 보았다
(허수경·시인, 1964-)
+ 숲은 어머니의 마음

숲 속에는
젖 향기가 느껴집니다
젖 향기는 태초의 그리움입니다

숲 속에 있노라면
요람 같은 평화로움이
나를 취하게 합니다
풀내음 속에 어머니의 박가 분이 생각납니다
하얀 모시치마 저고리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머니 냄새

숲은 어머니처럼
언제나 너그럽게 꽃을 키우고
새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숲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인자하고 따뜻합니다.
(신혜림·시인, 서울 출생)
+ 숲

숲을 보았는가?
천년의 원시림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그 웅장한 거목들의 몸짓을 보았는가?
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면
서울 근교 광릉의 아름드리 잣나무밭쯤에
가 보아도 좋네.

그 나무들 곁에 가 고개를 들면
우리가 시정에서 서로 키를 겨루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가를 보게 되지.

그 나무들 곁에 가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주고받는 일상의 말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쓸모 없는 소리인가를 듣게 되지.

아니, 그 나무들 곁에 가 서게 되면
우리가 그 동안 걸었던 먼 길이
얼마나 고달프고 덧없는 짓이었던가를 알게 되지.

저 건장한 어깨와 어깨들을 서로 나란히 엮어
자라는 저 순금의 단란
그들이 지닌 유일한 언어……
저 긍정의 푸른 모음들
그리고 그들의 싹을 틔운 어머니 대지를
한 치도 배반하지 않는
저 충직과 인내.

숲을 보았는가?
몇 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이 서 있는
그런 숲에 가 보게
그 숲에 가서 한 둬 시간 머물다 보면
우리는 한 십년쯤 더 자라서
빈 가슴으로 돌아오게 되지.
(임보·시인, 1940-)
+ 숲길에서

금속성의 비정에서 잠시 벗어나
바람결 타고 흐르는 새소리도 들으며
풀잎새 한들거리는
숲길이고 싶어라.

모든 가치의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대체 무엇이며
삼라만상은 어떤 뜻인가
그 모든 잡다한 일들
그냥 잊고 싶어라.

하늘엔 구름 한 장 숲 사이로 흘러가고
소중하고 눈물겨운 한 순간을 위하여
바람도 맑은 소리만
가려듣고 싶어라.
(강세화·시인, 1951-)
+ 숲 속에서

어떤 것은 예리한 도끼로 쳤고
어떤 것은 잔인하게 톱으로 싹둑
베어버렸다.
외진 숲 속의 잘린 나무들,
아직도 나이테 선명하고 송진향 그윽한데
너는 일말의 적의도 없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세상에 베풀기만 하였구나.
살아서는 꽃과 열매를 주고
우리로 하여
푸른 그늘 아래 쉬게 하더니
어느 악한이 장작 패서 불태워버렸을까,
어느 무식이 너를 잘라 불상을 새겼을까
그래도 모자람이 있었던지 너는
죽어버린 끌덩이에서조차
파아란 이끼를 키우고 또 다소곳이
버섯까지 안았구나
딱새, 벌, 산꽃, 다람쥐, 풀잎 심지어는
혀를 낼름거리는 꽃뱀까지도
왜 너와 더불어는 평안을 얻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소신공양이 따로 없느니
네가 바로 부처인 것을
내 오늘 산에 오르며 문득
자연으로 가는 길을 배운다.
(오세영·시인, 19420)
+ 숲 속의 성자

거리마다 연등이 높이 켜지고
연둣빛 바람 잔잔한 물결로 일렁이면
마음 가까운 숲으로 가자

오늘은 투명한 날, 햇살들 가볍게 웃어대지만
흐린 날을 생각하여 탁주 한 병 사들고
언젠가 바삭바삭 부서질 몸, 과자도 몇 봉다리
갖고 가 안주하면서
소쩍당 소쩍당 두견이 울음이라도 듣노라면
암 선정이 따로 있나
명상이 따로 있나
내면의 여행은 길기만 하다

살며시 바람아 다가와라
노랑나비야 오월의 어린 잎 새순에 앉아
견고한 일상을 잊어버리고 허공에 떠가는
흰 구름의 느린 보행을 바라보자
바위 틈 약수가 콸콸 나오니
배가 마르지 않고 생각 또한 기름지구나

건기와 우기가 자주 엇갈리는 우리들 생애
한번쯤 언뜻 청명한 날 찾아
고요한 숲 속에 이르면
시드러운 몸 다시 생기가 돌고
끊임없이 타고 오르는 수액이 부풀어올라
나는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내가 되어
숲은 한줄기 바람으로 넉넉한 새울타리가 된다

그 서늘한 그늘에서 나는 성자가 된다
숲 속에선 무엇이나 성자가 된다.
(하재일·시인, 1961-)
+ 숲의 가슴에 안겨

숲에 닿으면
순리를 받들며 흐르는 물이 반갑다 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놀던
풀꽃과도 눈을 맞추며
포근하게 안겨오는 초록 안개
초록 습기와 살을 비빈다.

흙내음이 더운 김을 뿜어오고
허브 향기로 스미는 초록의 알갱이들이
열린 내 몸 속으로 달려와 나를 애무한다
바람은 입었던 내 옷가지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알몸의 나는 듬직한 바위에 누워
나뭇가지 사이에서 뛰노는 햇살에 얼굴을 묻고
숨이 가쁘다
두 눈을 감고
나는 흰 구름 속으로 날아간다

몸 속의 조리개를 열어놓고
숲으로 가는 날은
나와 숲이 만나 몸을 푸는 날이다
위로받고 싶은 날엔 숲으로 간다
(최금녀·시인)
+ 숲과 세상

태고 적부터 지금까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서로 다른 색깔의 초목들
껴안은 모습이 경이롭다.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계절에 따라 열매를 내주며
미움과 다툼도 없는
공생과 존중이 숭고하다.

누가 숲을 다스리기에
이렇게 평온할 수 있을까
정치(政治)가 없는 숲에서
참 정치를 깨닫는다.

世上에서 실망한 사람들아
모두 숲으로 들어오라
서로를 아우르는 이 행복
숲의 기운을 들이마시자
(박인걸·목사 시인)
+ 숲 속의 평화

나는 어두움을
거부한 세상 속에서
가로등 불을 의지하여
밤길을 가고 있지만
교회에서 내 삶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돌아가는 중이지만
저 숲은 기도가 뭔지 몰라도
평화라는 말하지 않아도
평화 속에 잠들어 있다

희미한 호롱불도
작은 등불도 켤 수 없는
무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지만
완벽한 어둠 속에서
꾸르륵 꾸르륵
어린 새의 잠꼬대 소리만
간간이 새어나오는 숲은
창조주의 어두움에 순응하여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의 마을과 달리
새든 벌레든 짐승이든
그 품에 깃든 생명체들을
모두 끌어안고 잠든 숲은
아담과 하와가 없어서
아직도 에덴동산이다
(유한나·시인, 강릉 거주)
+ 숲이 되지 못한 나무

숲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이 된다는 것을
작은 나무 몇이 서는
아름드리나무 혼자서는
절대
숲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숲 밖에서는 몰랐다.

동구에 서서 한철 동안
푸른 그늘 넓게 펴도
천년을 풍광의 배경이 된다할지라도
혼자 서 있는 나무는
숲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그저
한 그루의 나무일 뿐.

숲이 되지 못한 나무
가슴에 귀를 대고
속울음소리 듣고서 숲을 생각했다.
숲이 그리워
숲이 되고 싶어 울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그때서야 알았다.
(정성수·시인, 1945-)
+ 숲

숲 속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나무와 나무가 서로 기대어
온갖 조건과 환경을 잘 견디고 있는 것을

햇살이 비칠 때면
지그시 감았던 두 눈 뜨며
자연과 합일되고
강풍이 몰아치면
원가지 곁가지 잔가지 마른가지
할 것 없이 포옹하며
모진 비바람 견디어 내는 것을

사람이 사는 것도 별것 아니다
어려울 때 서로 기대고
힘들 때 버팀목이 되고
가려울 때 그 부분을 긁어주며
연리지처럼 어우러지고 함께 뒹구는 것이다

햇살과 비바람이 존재하기에
빛과 어둠이 상생하기에
자신의 밝고 어두운 여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반기룡·시인)
+ 숲의 본질

숲은 숲이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큰 나무 작은 나무
굽은 나무 곧은 나무
소나무 참나무 아카시아 후박나무..
뚜렷이 볼품없는 여린 들풀까지도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서

꾀꼬리 참새 까치
매미 나비 풀벌레..
누구나 다 맘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숲인 것이다

찬 기온엔 서로를 품어가면서
비바람엔 서로를 감싸주면서
그렇게 오손도손 살아가는 곳

그곳이 살아있는 숲인 것이지

겉보기에 번듯하고
깨끗하고 훤하기만 해
그저 허울만 번지르르 보이는 것은
숲이 아닌 도심빌딩 얘기다

그러니 숲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면

숲을 숲으로 여길 줄 아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소나무 숲에서

어디선가
먼 곳에서
다정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데
까치 몇 쌍 찾아와
깍깍 울어대는 고갯길.
그 누구의 꽃상여인지
장송곡 소리는
실바람을 타고 멀어지는데
고요뿐인 허공에 목을 걸어놓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순수의 푸른 눈빛.

목회자가 없는 성당이네
의자도 없이 기립자세로 서서
먼 하늘에 가슴을 묻고
적막을 씹어대는 숲.
(진의하·시인, 1940-)
+ 소나무 숲에는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 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데만 바라보겠는가
(이상국·시인, 1946-)
+ 대숲에 가면

괜시리
마음이 공허한 날에는
대밭에 가서
우주의 소리를 들어본다
제 몸을 비우고 유성음으로 속내를 채운
대나무처럼

서걱서걱 우는
삶에도 연주는 필요한 것,
달빛의 숨결과
댓잎의 노래가 살고 있는 그곳에
새떼가 몰려오듯
바람이 불어와 소리를 조율하는
대숲에 가면

내 사랑, 언제나
저렇게 득음할 수 있을는지
(이소연·시인, 전북 전주 출생)
+ 여름 숲

언제나 축축이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권옥희·시인, 1957-)
+ 가을 숲

새 한 마리 우는소리가
도끼로 찍어내듯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뜨린다.

백년 묵은
나무 뿌리의 향기를
흔들어 깨우고,

한해살이 풀잎 사이를 스치는 메아리는
단풍잎 선명한 시냇물 따라
미끄러지듯 낮게 기어가다 사라진다.

여름날 하늘을 가르던 천둥소리가
나무들의 뿌리 아래 잠들어
가을 숲 향기가 하늘로 퍼져나간다.

수북한 낙엽에 발목을 빠뜨리며
한 아이가
품속에서 날아간 새를 찾는다.
(최동호·시인, 1948-)
+ 겨울 숲을 아시나요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무리도 숨어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살아요
(홍수희·시인)
+ 겨울 숲에서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 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 숲의 검은 침묵을
(이재무·시인, 1958-)
+ 겨울 숲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은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복효근·시인,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현종의 ´부엌을 기리는 노래´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