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1일 월요일

신현정의 ´야 단풍이다´ 외


<단풍 시 모음> 신현정의 ´야 단풍이다´ 외

+ 야 단풍이다

지나가는 누구들이 무수히 입을 맞추고 가지 않은 다음에야
저리 황홀해 할 수가 있겠는가
숨이 막히도록 퍼붓는
입맞춤에 입맞춤에
혼절, 혼절, 또 혼절.
(신현정·시인, 1948-)
+ 단풍

개마고원에 단풍 물들면
노고단에도 함께 물든다.
분계선 철조망
녹슬거나 말거나
삼천리 강산에 가을 물든다.
(류근삼·시인, 1940-)
+ 단풍

산을 넘던 무지개
산허리에 걸려 넘어진다
찢겨진 살 틈에서
핏방울이 흘러 골짜기에 고이자
나무들이 절기의 붓을 빼 들어
제 옷에 찍어 바르고 있다
윗도리부터 아랫도리까지
(김태인·시인, 1962-)
+ 단풍

앞날이
순탄치 않아

혹독하게
몰아치리라
예감하고들 있어

분기탱천한 구월이
피를 토하는 거야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단풍놀이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서정춘·시인, 1941-)
+ 단풍나무 한 그루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시인, 1961-)
+ 가을 단풍

더 이상
속 깊숙이 감춰둘 수 없어서
더 이상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어서

세상 향해 고운 빛깔
뿜어내었다

반겨주는 이들 위해
활짝 웃었다

갈바람에 시린 가슴
달래주려고

파란 하늘 병풍에다
수를 놓았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단풍나무

단풍나무, 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가을이 오고 말았지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나는
산에 올라 못되게도
단풍나무에게 다 뱉어내
버렸지요 내 부끄러운 마음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아, 단풍나무,
고만, 온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데요
내 낯빛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해질수록
가을산마다, 단풍나무
붉게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김현주·시인, 전북 전주 출생)
+ 단풍

아버지 무덤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어머니
이제 그만 가시자고 하자
이놈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며
멀쩡한 잔디만 뜯어내신다.
정말 그러네요. 어머니 얼굴을 보니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드신다.
(이재봉·시인, 1945-)
+ 단풍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박성우·시인, 1971-)
+ 단풍의 이유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이원규·시인, 1962-)
+ 단풍과 수녀

저마다의 색깔로
하혈하는
가을 산 속
깊이 젖어드는 비
산을 적시다
회임을 위하여 저무는데
저 높은 곳 맺은 언약
땅에서는 잉태되지 못하는 공복
오래 묵은 지방을 태우는
원색의 고해성사
울긋불긋 피어나는가
하늘이 내려와
승화하는 신앙고백
가을에 기대어 실비처럼 울다
가 닿지 않는 곳으로
높아 가고 있다.
(권성훈·시인, 197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나영의 ´바닥論´ 외 "> 이동순의 ´아름다운 세상´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