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묵어 분신이 된 벼루 하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한 사내가 거울 속에 비친
정면 대결의 눈빛에 굴복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 먼 바다 소금기 짙은 투명한 물로
벼루에 짙게 먹을 갈고
성근 올 사이 먹이 잘 묻어나오도록
아교를 먹인 고운 비단 옷 같은
그녀를 눕힌다
붓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에
대(竹)를 친다
다리 아래 밑동부터 붓을 밀어 올려
시퍼런 줄기를 단숨에 그린다
이제 붓은 내 몸이다 나의 몸 끝을 세워
갈고리 마디를 낚아채듯 휘감는다
이어질 듯 말 듯 마디 사이를 남기고
비틀어 뻗어 올린다 세 줄기의
바람 타는 대(竹)가 잔 가지를 치고
잎을 매달았다
창호에 비치는 달인 양 은은하다
내 몸 같은 붓을 뉘어 그녀의 젖무덤에
언덕을 그려 넣는다
줄기가 조금씩 비틀거리며 올라간다
활처럼 휜다 당겨진 시선처럼 팽팽하다
나의 몸이 갈라지며 바람 소리가 인다
검은 먹물을 온몸에 듬뿍 찍어
가지와 잎을 그려낸다 잎들은 흔들리며
피리 소리를 낸다
한 없이 부드러운 살갗 속에서
뼈처럼 단단한 선(禪)이 흘러 나온다
나의 몸, 붓 한 자루로 세계를 이루었으니
우주(宇宙)가 별똥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