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임길택의 ´엄마 무릎´ 외
<무릎에 관한 시 모음> 임길택의 ´엄마 무릎´ 외
+ 엄마 무릎
귀이개를 가지고 엄마한테 가면
엄마는 귀찮다 하면서도
햇볕 잘 드는 쪽을 가려 앉아
무릎에 나를 뉘여 줍니다.
그리고선 내 귓바퀴를 잡아늘이며
갈그락갈그락 귓밥을 파냅니다.
아이고, 니가 이러니까 말을 안 듣지.
엄마는 들어 낸 귓밥을
내 눈앞에 내보입니다.
그리고는
뜯어 놓은 휴지 조각에 귓밥을 털어놓고
다시 귓속을 간질입니다.
고개를 돌려 누울 때에
나는 다시 엄마 무릎내를 맡습니다.
스르르 잠결에 빠져듭니다.
(임길택·아동문학가, 1952-1997)
+ 모래밭에 무릎을 꿇다 - 섬진강 편지·54
이까짓 모래밭쯤이야,
액셀레이터를 밟았는데
한순간, 바퀴가 헛돌더니
밟으면 밟을수록 가라앉는
現代 문명의 象徵 DOHC 엔진도
이 잘디잔 모래의 부드러운 힘 앞에서는
맥없구나, 참으로 맥없구나
오랜 세월 매운 바람에 떠밀리면서도
서로를 끌어안아 언덕을 이루는
흩어짐 없는 모래의 정신 앞에
한낱 고철덩이가 되어버린
자동차와 함께
나도 그만 무릎을 꿇었다
(김인호·시인, 1959-)
+ 무릎을 꿇고
매일 밤
몰래 자란
수염을 깎듯
저녁마다
하루종일 자란
지우지 못한
생각의 잡초를
밀어낸다
아무도
모르고 있는
긴 밤을 위해
손을 씻고
발을 닦듯
두 손을 모아서
하루를 깎고 씻는다.
(小石 정재영·시인)
+ 무릎잠
어머니 설거지를 끝내고
창가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찬찬히
아침 신문을 보실 때
나는 슬며시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창밖엔
개나리가 피었다
(정호승·시인, 1950-)
+ 무릎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끓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정호승·시인, 1950-)
+ 낙타무릎의 사랑·1 - 피정(避靜) 일기
수도원보다 오래된 늙은 측백나무,
한쪽 허파「肺」를 떼어낸 사람처럼 서 있다.
한쪽 가지는 고사목이 되고,
다른 한쪽 가지에만 푸른 잎들이 휘휘 늘어져 있다.
턱턱 숨막히는 저쪽 세상,
망가진 허파로 고통스레 헐떡이는
저어쪽을 위해
스스로를 울안에 봉쇄한 채
아침저녁,
낙타무릎 되도록 엎드려
고요하고 뜨거운 숨 바치는 수도자들.
나는 보았다.
오늘도 청정(淸淨)한 우주 생명 위해
낙타무릎으로 걷는 싱싱한 허파!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낙타무릎의 사랑·2 - 피정(避靜) 일기
닳고닳아 낙타무릎이 되었다.
봉쇄수도원의 수도사들,
이젠 허파를 들썩이며 숨쉬지 않고
무릎으로 숨, 쉰, 다.
성체조배 시간, 핏빛 성체를 향해 몸과
혼을 고정시키는 힘,
속으로 울부짖어도 아무 응답 없는
저 神의 침묵을
견디는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올까.
숨쉬는 무릎에서 나올까.
봉쇄된 울타리를 무릎으로
기어 넘을 순 없지만,
마루짱에 닿은 무릎에서 나오는 고요한 숨결은
유월의 붉은 줄장미 넝쿨처럼
훌쩍, 울타리를 넘는다.
닳고닳은 무릎은 힘이 세다.
우주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루짱이
움푹 패였다.
기도는 힘이 세다.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무릎
다리가 시큰거립니다
운동복을 들추자 시든 꽃잎이 보입니다
수술대 열두 달
아물지 않는 가슴 줄기에
하얗게 눈물 꽃이 피어납니다
시든 꽃잎을 들춰봅니다
굵은 가시가 깊게 박혀있는 무릎에
어머니 무릎이 겹칩니다
˝어미 죄가 많아 니가 아프구나˝
종일 무릎 끓고 기도하는
떠나지 못하는 그 통증이 보입니다
(정아지·시인)
+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대나무 잎과 잎이 서로의 귀를 갈아준다
어린 새가 그 사이에서 퍼덕거린다
퍼덕거린 만큼의 전율이 대숲에 좌악 펼쳐진다
대숲을 품고 있던 산이
울컥 토해놓은 놀 찌꺼기
찌꺼기가 잎마다 반점처럼 묻어 있다
그 아래에서
나는 귀신처럼 서성거렸다
대숲에 들어가면
내 생을 애태웠던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제 몸 속에 깊은 우물을 판다
우물 속으로 들어간 시간을 불러내면 안 된다,
그러면 대나무 잎들이 날카로운 칼로 변해
내 몸을 베려고 덤빌 것이다
무엇을 완성하려고 하면 안 된다,
대숲에선 속에 든 것을 울컥울컥
토해놓아야 한다 토해놓을 것이 없으면
내장이라도 토해놓아야 한다
나날이 비우고 비우기 위하여
사는 대나무들,
비운 만큼 하늘과 가까워진다
하늘을 보라,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
어찌 저토록 당당하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
다 비운 자들만이 죽어 하늘로 간다
뭐든 채우려고 버둥거리는 자들은
당장,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김충규·시인, 1965-)
+ 새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매는 사납지만 하늘을 유연하게
선회할 줄 안다.
하늘의 빈 공간이 무섭고 적막하기 때문이다.
매는 사납기 때문에 적막하지만 머리를 함부로 떨어뜨리거나
무릎은 굽히지 않는다.
지상에서, 다시 후미진 뒤안으로 처져 산다는 것이 그토록 적적하여
무릎을 두, 세 번씩 꿇는 먹물들에겐 믿기지 않는 일이다.
매는 아무리 죽는 고비에 빠져들어도
날개를 접으면 접었지 무릎으로 굴복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무릎을 꿇지 않는 매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릎 꿇는 먹물들에 대해서다.
(김규태·시인, 193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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