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6일 월요일

철거

생에서 한 번쯤
피난가야 할 때가 있다
내 얼굴의 어느 한 쪽
북한산 기슭이 낡았다고
새 집을 지어주겠단다
이사 가란다
막무가내로 허무는 중이다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한참을 밥 짓고 빨래 널었더니
내 머리에 벌레 먹고
바람 많은 세월로
내 어깨의 문짝이 뜯겨 나갔다
담벼락 대신 세게 쳤더니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따뜻한 꿈 꾸었던
마음에 찬 서리 내려앉고
든든하게 아침길을 열어주었던
손과 발이
흙먼지와 나뒹굴며 벗하고 있다
마당의 예쁜 꽃 바라보았던
창문의 눈빛 다 깨지고
어둠을 막아주었던
등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은밀한 사랑 나누었던
입술도 혀도 잘려나가고
폐허의 한 가족이
달랑 짐보따리 하나 남았다
팔과 다리 잘라내는
옛날의 어느 무서운 형벌 같다
몸통을 질질 밀면서 피난간다